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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정현 대표, 아무래도 장을 지져야 할 것 같소

ⓒ 오마이뉴스


남아일언중천금. 21세기 시대에 이 무슨 케케묵은 고루한 소리냐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성중심의 중세적 편견이 오롯이 묻어나는 이 표현을 꺼내들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그러나 말과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고언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까지 폄하하고 퇴색시킬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한마디 말이 마치 티끌이나 먼지처럼 하찮게 여겨지는 불신의 시대가 아니던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 고언은 어쩌면 적극 권장하고 장려해야 할 시대의 미덕일지도 모릅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은 의역하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말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으면 다른 것도 아닌 천금에 비유했을까요. 다시 한번 말이 지니는 무게를 실감하게 됩니다.


불행히도 지금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서스럼없이 부정하는 불신의 시대이자,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몰염치'의 시대입니다.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은 말바꾸기와 약속 파기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거짓말은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위해하는 '사회악'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5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다시 한번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지난달 30일 야당이 임기 단축 협상에 응하지 않고 탄핵을 계속 추진한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던 말을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는 "저는 (야당이) 탄핵을 강행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한 적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이 대표는 5일 최고위원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내가 언제 탄핵을 강행하면 장 지진다고 그렇게 말했나. 야당이 즉각 사퇴를 요구하게 된다면 1월에 대선을 치르게 되는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한 것 아닌가"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대표는 당시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 내용을 잘못 이해해 기사로 내보낸 것이라며 자신은 "장을 지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말인즉 하지도 않은 말을 기자들이 기사로 내보냈다는 겁니다.

이 대표의 해명은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당시 이 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분명히 "장을 지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저하고 뜨거운 장 지지기 내기를 한번 할까요?", "만약에 당장 지금 그걸 이끌어 내서 관철시킨다면 제가 손에 장을 지질게요. 뜨거운 장에다가 손가락을 넣어서 장을 지질게요"라고 힘주어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대표가 문제의 발언을 한 시점은 지난달 30일 의원총회 직후입니다. 3차 대국민담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진퇴문제를 국회에 일임하겠다고 발언하자 정치권이 쑥대밭이 된 바로 그 다음날입니다. 대통령이 국회를 향해 '툭' 던진 말 한마디에 비박계의 탄핵 강경 기류가 순식간에 와해되고, 야 3당 역시 해법마련에 분주하던 그 타이밍에 이 대표의 "장을 지지겠다"는 발언이 나온 겁니다.

당시는 대통령의 '묘수'가 먹히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박계는 심각하게 흔들렸고, 야당도 자중지란에 빠졌습니다. 비박계는 친박계가 주장했던 '대통령 4월 퇴진, 6월 조기 대선'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야당은 임기단축 협상과 탄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가 "야 3당 대표가 '임기 단축 협상'을 하지 않겠다 정리했다"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야당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장을 지지겠다"고 대답한 겁니다. 아마도 흔들리는 비박계와 물건너간 탄핵, 출구없는 야권의 처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어떤 확신이 이 대표에게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 오마이뉴스


그러나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급변했습니다. 전열을 재정비한 야 3당은 '임기 단축 협상'은 단연코 없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고, 3일 새벽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제외한 야권 의원 171명 전원 명의로 탄핵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서울 170만명, 전국 232만명(주최측 추산)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촛불집회가 열렸습니다. 급기야 촛불민심을 재확인한 비박계는 오는 9일 탄핵표결에 참석하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이 대표가 "장을 지지겠다"며 조건으로 내걸었던 야권의 '임기 단축 불가 선언', '탄핵안 발의, '탄핵안 표결'이 모두 충족된 상황입니다. 이 대표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장을 지져야만 하는 아주 고약한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자 이 대표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말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말은 대통령이 즉각 사퇴를 하면 내년 1월에 대선을 치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겁니다. 공당의 대표로서, 정치인으로서 무책임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한심한 모습입니다.

물론 이 대표의 말 바꾸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지난 9월 말에도 그는 야당 정치인의 단식투쟁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난해왔던 과거의 태도를 바꿔 단식에 나섰습니다. 지난 대선 박근혜 캠프 공보단장 시절의 '투표시간 연장법'과 '먹튀 방지법' 관련 말 바꾸기, 농민 시위 사망 관련 말 바꾸기 등도 이 대표의 말 바꾸기를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말을 자주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입장과 태도를 자주 바꾸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특히 국민이 직접 뽑은 선출직 공직자인 국회의원의 말은 천금과도 같이 막중합니다. 결코 허투루 해서도 추호의 거짓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스스로 부정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위정자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참상은 자신의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 위정자들이 권력을 오남용한 결과라고 해도 크게 틀림이 없습니다. 현 대통령이야말로 이를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본입니다.

이 대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우는 이 대표는 오늘의 위태로운 시국을 만든 책임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입니다.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온갖 실정과 파행을 방조하고 방기하는데 이 대표가 누구보다 앞장서 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주변에 직언과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가신들이 있었다면 사태가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통령 주변에는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부와 아첨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소위 '간신'들만 우글거렸을 뿐입니다.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 '십상시'와 '간신' 같은,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구시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대한민국이 현재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한때 청와대 홍보수석이었고 현재 집권당의 대표를 맡고있는 이 대표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입니다. 

호기롭게 손에 "장을 지지겠다"던 이 대표의 공언이 '역시나' 거짓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바로 그 거짓말 때문에, 이내 드러날 뻔한 거짓말 때문에 대통령이 탄핵당하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나 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거짓말을, 집권여당 대표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나물에 그 밥이 따로 없습니다. 이처럼 낯부끄런 인식과 태도를 지닌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가 그동안 대한민국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대의 불행이자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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