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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탄핵할 테면 해보라는 외골 대통령

ⓒ 오마이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안이 가결돼도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탄핵안 표결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탄핵 여부에 상관없이 당장 대통령직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는 국민과 야권이 요구하고 있는 조건없는 즉각 퇴진을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5천만이 달려들어도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예측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박 대통령은 6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탄핵소추 절차를 밟아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 과정을 보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차분하고 담담하게 갈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탄핵이 가결되면 상황을 받아들여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는 뜻을 피력했습니다. 탄핵안이 통과되더라도 중도 사퇴하지 않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맞서 법리 대결에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뜻입니다.

예상대로입니다. 이날 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스스로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였습니다. 특히 "탄핵소추 절차가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과정을 보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차분하고 담담하게 갈 각오가 돼 있다"고 언급한 부분이야말로 박 대통령다운 인식과 태도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는 장면입니다.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박 대통령이 뼛속까지 철저하게 '국가주의자'라는 사실입니다. 국가주의자에게 최상의 가치는 체제의 안녕과 존속이며 정권의 유지입니다. 그들은 체제를 흔들림없이 지켜내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자 절대선으로 규정합니다.

문제는 국가주의자들에게 있어 국가의 개념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국가를 국토, 국민, 정부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유기적 개념이 아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권, 체제, 권력자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통치했던 유신독재시대는 국가주의자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야만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국가는 곧 박정희로 통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가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국가전복세력으로 몰려 목숨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 시절은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구금, 구타, 투옥했던 서슬 퍼런 철권통치가 극에 달한 시절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국가를 곧 체제와 정권, 권력자로 인식했던 그 시절 권력의 심장부에서 온갖 특혜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국가관을 고스란히 전수한 것은 물론, 박정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국가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권력을 마음껏 향유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박 대통령을 둘러싼 제반 환경은 그를 국가주의자로 성장시키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즉각적인 퇴진과 탄핵을 촉구하는 압도적인 국민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힌 대목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국가주의자로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박 대통령의 자격없음을 성토하며 당장 물러날 것을 촉구하고 있는데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버티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도단도 이만한 언어도단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해하는 국가와 국민의 개념이 시민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방증입니다.




이날의 화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두번째 사실은 박 대통령이 대단히 심각한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회담을 통해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 모두는 최순실 개인의 비리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구속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 측근들이 박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기밀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하고, 재단 설립과 기금 모금에 나섰다고 증언했음에도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끝까지 선의라 주장하며 법리 공방으로 가보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행위가 선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6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서는 재단 기금 모금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증언이 기업인들로부터 직접 터져나왔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순실 측에 94억원을 지원한 것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고 진술했고, 최태원 SK그룹 회장 역시 최순실씨가 독일로 80억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철승 전경련 부회장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재단설립과 기금 모금에 청와대가 직접 관여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부회장은 전경련이 청와대의 지시와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진술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두는 재단 설립과 기금 모금이 기업들의 자발적인 의사였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박 대통령의 강제 모금이냐, 아니면 기업들의 선의에 의한 자발적인 출연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기업들의 입장에 달려있습니다. 칼자루를 쥔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모금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필요도 없다. 경제인들 스스로 상호 협의 조정해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지난 10월 18일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실 감사에서 당시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에게 질의한 내용입니다. 안 수석이 "맞는 말인 것 같다"고 답하자 노 원내대표는 저 발언이 1988년 11월 5공 청문회 당시 장세동씨의 주장이라고 상기시켰습니다. 이어 "지금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의혹이 바로 이런 것이다.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회장이 '편히 살려고 시키는데로 했다'고 강제모금을 시인했던 증언은 유명한 발언이다"라며 기업들에 대한 강제모금 의혹을 추궁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시절에 기업들에 자행된 강제모금 역시 이처럼 국가를 위한 명목이라 포장되었습니다. 기업들로부터 강제로 자금을 모금해 놓고도 권력자들은 그것이 국가통치를 위한 선의이자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이라 둘러대온 것입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강제모금을 자발적이라 주장하는 장세동씨와 박 대통령의 인식은 놀라우리만큼 닮아있습니다.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은 살아있는 권력이 기업의 팔과 목을 비틀어 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을 강제모금한 권력형 비리 사건입니다. 검찰이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하고, 야권이 탄핵소추안에 '뇌물죄'를 포함시킨 것도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을 선의에 의한 통치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의 위법행위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헌법학자들 사이에서도 박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요지부동입니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하고 있고, 헌법 전문가들조차 탄핵 사유가 넘친다고 지적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버티기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박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인 즉각적인 사퇴를 일축함에 따라 오는 9일 탄핵안이 가결되면 헌재의 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최고 6개월 동안 대한민국의 국정 혼란은 피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음은 물론입니다. 국가과 국민을 위해서 물러날 수 없다는 박 대통령 때문에 국가와 국민이 고통과 절망 속에 신음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박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와 국민은 도대체 어떤 나라의 어떤 국민일까요. 그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담한 시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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