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이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차 촛불집회가 열렸던 지난 주말 오후. 청와대 주변 길은 청와대를 에워싸는 인간띠 잇기가 펼쳐지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민들은 청와대를 기점으로 서촌방면과 북촌방면으로 거대한 인간띠를 이루며 청와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이날 청와대는 성난 시민들에 둘러싸인 도심 속 작은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날 시민들의 함성은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눈발이 휘날리는 매섭고 궂은 날씨조차 시민들의 결집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광화문 일대에서만 150만명(전국 190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목청껏 외쳐댔다. 꺼지기는 커녕 점점 커져만 가는 촛불의 열기는 박 대통령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립무원. 박 대통령의 처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 또 있을까. 수족처럼 부리던 참모도 십수년을 동거동락했던 비서관도 제 살 길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보수언론과 보수세력도 돌아섰고, 박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자 버팀목인 대구·경북의 민심마저 싸늘하게 식었다.
어디 이뿐인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든든한 방패가 되어왔던 검찰이 외려 박 대통령에게 칼 끝을 겨누고 있다. 특검수사와 국정조사를 앞둔 시점에 법무부 장관과 민정수석이 사의를 표명하는가 하면, 교육부의 국정교과서 철회 시사에서 보듯 관료들의 항명 사태도 표면화되고 있다.
새누리당의 모습은 그보다 더 가관이다. 이미 박 대통령이 돌이킬 수 없는 폐족의 길에 들어섰음을 직감한 탓인지 매몰차기가 이를 데가 없다. 박 대통령과의 갈라서기를 주도하고 있는 비박계는 아예 노골적으로 탄핵을 거론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탄핵 찬성파가 40명에 달하고 있고 그 숫자는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라며 박 대통령을 향해 엄포아닌 엄포를 놓고 있다.
박 대통령과의 거리두기는 친박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미 내부 분열의 조심이 엿보이는 가운데 급기야 박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을 거론하며 선긋기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28일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의원을 비롯해 최경환, 정갑윤, 유기준, 홍문종, 윤상현 의원 등 다수의 친박 중진들이 박 대통령의 질서있는 퇴진, 즉 하야를 청와대에 건의했다. 이는 국민의 거센 퇴진 요구에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박 대통령의 의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태다.
박 대통령을 지켜주던 최후의 보루, 친박계의 변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친박계의 제안은 박 대통령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활화산처럼 번져가는 촛불민심,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 사실상 분당 사태에 빠진 새누리당의 내분 등 상황은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정황 증거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친박계 내부에서조차 "맞아 죽을까 봐 무서워 지역구에 못 내려간다"는 읍소가 나올만큼 동반 추락과 몰락의 위기감에 횝싸여 있는 것이다. 친박계 입장으로서는 최악의 파국에 이르기 전에 박 대통령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할 수 있는 퇴로를 열어주고, 들끓고 있는 국민적 분노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탄핵 열풍에 휘말리기 보다는 박 대통령의 퇴진 요구에 편승하며 후일을 도모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이다.
ⓒ JTBC 뉴스 화면 갈무리
친박계의 명예로운 퇴진 제안은 탄핵과 함께 개헌을 추진하려는 새누리당 비박계, 야권 일부 세력의 개헌 주장과 맞닿아 있다. 집권 가능성이 요원해진 새누리당내 비박계와 '문재인 대세론'을 흔들어보려는 야권 내 비주류의 정치공학 사이에 공통분모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분권형 개헌은 풍비박산으로 치닫는 새누리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친박계의 제안은 안팎으로 퇴진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박 대통령과의 거리두기에 나서는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개헌 주장에 발맞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겠다는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헌정 질서가 유린되고 국정이 마비되는 초유의 국가비상사태에서조차 새누리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따져 묻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의 탄핵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비박계나 명예로운 퇴진을 거론하며 딴 생각을 품고 있는 친박계나 '도긴 개긴'이기는 매한가지다. 저들의 권력욕은 박 대통령의 그것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에는 "박근혜는 물러나라"는 구호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는 "새누리당은 해체하라", "새누리도 공범이다"는 단호한 구호도 있다. 이 구호는 새누리당의 과거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지난 대선 무렵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새누리당이 박 대통령과 결탁해 민주주의와 헌법 질서를 농단한 사례들은 부기지수다. 헌법을 위반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 대통령의 거침없는 일탈 역시 새누리당의 방조와 비호 없이는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새누리도 공범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다.
'국정원 사건'부터 시작해서 '박근혜 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이와 잇몸의 관계였다.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며 민의를 무시하는 일방적 국정운영을 고집했고, 국민적 비판과 쓴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비민주적 통치를 고수해 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법치를 훼손시키고 정경유착과 정언유착의 구시대적 정치를 부활시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 역할을 해왔던 새누리당이 마치 점령군이나 된 것처럼 탄핵을 거론하고 명예로운 퇴진을 운운하고 있다. 시쳇말로 소가 웃을 일이다.
새누리당의 모습은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늑대가 엄마 양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주지한 바와 같이 새누리당이, 비박계든 친박계든 가릴 것 없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 결탁해 전대미문의 국정 혼란을 자행하는 동안 새누리당이 이를 철처하게 방조해왔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세간의 모든 시선이 박 대통령의 퇴진 여부에 쏠려있는 이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살 궁리에 여념이 없는 저들에게 동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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