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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근혜의 거짓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 오마이뉴스


스모킹 건(Smoking Gun). 이는 범죄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를 말한다. 탐정추리소설의 대부인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유래한 '스모킹 건'이 새삼 화제다. 지난 9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직무정지에 들어간 박근혜 대통령의 헌법·법률 위반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혀줄 증거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탓이다.

박 대통령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물은 현재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최순실씨가 국정 전반에 걸쳐 개입했다는 정황이 담겨있는 태블릿 PC, 박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빼곡히 담겨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그리고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기에 저장되어있는 녹음파일이 그것이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이 모두가 박 대통령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 즉 '스모킹 건'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어제(12일) 안 전 수석의 수첩에서 박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지시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지난 10월 최씨 관련 의혹이 쏟아져 나오자 위기를 직감한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위증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관련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르·K스포츠 재단의 설립과 기금 모금이 선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뜻이다.

구속된 안 전 수석의 업무 수첩은 모두 17권, 페이지 수만도 무려 510장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이 수첩에 청와대 회의 내용과 박 대통령의 지시사항 등을 세세하게 적어 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이 수첩에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해 위증을 직접 지시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의 수첩에는 선명한 글씨로 '전경련 O, 청와대 X', '강제모금 X', '재단 인사 관여X', '청와대가 주도하지 않고 혐의만 했음'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박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씨가 대기업을 압박해 미르·K스포츠재단을 설립하고 수백억원의 기금을 마련했다는 의혹이 재점화된 것은 지난 9월이었다. 언론과 야당,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집중 추궁하자 박 대통령은 9월 2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비상 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의혹을 단칼에 일축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당시 안 전 수석과 청와대 관계자, 전경련 역시 관련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그들은 최씨를 모른다고 잡아뗐고, 재단 설립과 기금 모금은 기업들의 자발적인 의사였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관련자들의 한결같은 부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점점 짙어져갔다. 언론은 연일 새로운 의혹을 보도했고,  야당은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정조준했다. 시민사회 역시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촛불시위에 돌입했다.


ⓒ 오마이뉴스


9월 22일 이후 박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박 대통령은 한달 여만인 10월 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만약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최씨의 국정농단 의혹 자체를 "비상 시국에 난무하는 비방"이자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이라 부정하던 기존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이같은 태도 변화는 사태가 심각성을 박 대통령이 비로소 인지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여전히 재단 관련 의혹에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의 수석비서관회의 발언이나 청와대 관계자의 국정감사 진술은 재단 관련 의혹을 최씨 개인의 비리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거짓 증언을 하라고 지시한 시점도 바로 그 즈음이다.

안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의 지시에 아주 충실했다. 그는 재단의 기금 모집을 주도한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감사에서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했고, 자신 역시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재단 설립과 기금 모금을 청와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는 죄다 거짓이었다.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최씨 관련 의혹을 알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최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국가권력을 동원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관해왔다. 이 와중에 박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 수차례에 걸쳐 거짓말을 하기까지 했다. 지난 9월 22일과 10월 20일 수석비서관회의 발언, 1~3차 대국민담화 모두는 진실과 거리가 먼 거짓가 기만으로 가득했다. 


이는 안 전 수석과 전경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단과 관련된 그들의 해명 역시 새빨간 거짓이었다. 끝까지 관련 의혹을 잡아떼던 안 전 수석은 검찰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 모든 것이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음을 실토했다. 국정감사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던 전경련의 이 부회장 역시 재단 설립과 자금 모금에 청와대의 강압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박 대통령이 최씨의 국정농단 개입을 철저하게 묵인·방조해 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은 최씨 관련 의혹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위증 교사까지 한 것으로 드러난다. 누구보다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할 국정 책임자가 이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이 탄핵에 이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계속된 거짓말을 늘어놓는 최고통수권자의 모습에 분노한 시민들이 의회를 압박해 결국 박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켜 버린 것이다. 세계가 극찬하고 전율해 마지않는 시민혁명의 대척점에는 이렇듯 시민이 부여한 권력을 최씨 일당과 공유하고, 이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려 하자 이를 은폐하려 했던 박 대통령의 거짓말이 놓여 있었다.

참담한 것은 박 대통령의 거짓말이 이제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은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는데, 또 다른 한 켠에서는 그 빛나는 과실을 갉아먹는 권력의 무도함이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 탄핵이 끝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존엄과 유린된 헌법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한 시민들의 위대한 여정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시민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권력의 위선과 거짓의 공고한 카르텔을 깨부수려면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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