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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학생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지인으로부터 SNS 통해 기사 하나를 전달받았다. 링크를 따라 들어가 봤더니 서울여대와 덕성여대 사이의 클라스를 비교하는 기사가 눈에 들어 왔다. 지금 대학가는 축제가 한창인 모양이다. 기사는 대학 축제를 맞아 대학에서 벌어진 일들을 비교하며 이에 대한 사람들의 열띤 반응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안에 대해 대학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사람들로부터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축제를 맞은 대학에서는 지금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과 임금인상을 위한 청소 노동자 노조의 파업이 진행 중이다. 공교롭게도 청소 노동자의 파업과 축제가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런데 청소 노동자 노조의 파업에 대응하는 대학의 방식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청소 노동자 노조의 파업관련 현수막을 철거하며 축제에 우선 순위에 두었고, 다른 한쪽은 파업 과정에 있는 청소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축제기간과 겹친 청소 노동자 노조의 파업에 대응하는 대학의 반응에 사람들의 평가는 찬사와 비난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사이의 선악구도 자체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이다. 저 둘의 시시비비는 땅에 보편적 가치와 도덕률이 살아있는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다.

"교내 학우와 더불어 지역사회, 나아가 학교생들과의 교류의 장이 되는 서량제에서 보다 낳은 축제 환경조성을 위해 철거를 결정하게 됐다. 학생회는 학교와 노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학생들이 즐길 있는 서량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서울여대 총학생회 입장


청소 노조의 현수막을 철거한 서울여대 총학생회의 항변은 철저하게 학교 축제인 서량제에 맞추어져 있다. 총학생회가 학교 미관을 해치는 노조의 현수막을 용납할 없는 이유는 첫째도 축제, 둘째도 축제, 셋째도 축제다. 아이러니가 아닐 없다. 총학생회가 축제 환경조성을 위해 현수막은 철거하면서 정작 학교 전체의 미관을 책임지는 청소 노동자들의 고통과 아픔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년에 한번 뿐인 축제를 보다 예쁘고 멋들어지게 만들길 원하는 총학생회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대학시절이야말로 비교할 수 없는 인생의 황금기가 아닌가. 그들은 충분히 시절을 즐기고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것은 역시 돌봄과 배려의 실종이다. 오직 학생들이 즐길 있는 서량제를 만들기를 원했던 서울여대 총학생회는 '즐긴다는 ' 의미와 방법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고민 성찰 필요가 있다.





"우리 학교 가장 지저분하고 어두운 곳에서 일하시는 미화 어머님들, 비정규직 미화 어머님들의 근로 환경 개선과 최저 임금 1만원 쟁취를 함께 지지하고, 연대하는 어머님들과 학생들의 연대 주점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모든 수익금은 미화 어머님들 복지 기금과 투쟁 기금으로 쓰입니다" - 덕성여대의 '어머니를 부탁해' 연대주점 취지문 일부


덕성여대는 오는 28일부터 시작되는 학교 축제에서 '엄마를 부탁해'라는 연대 주점을 열기로 했다. 취지문에 드러나는 것처럼 주점의 목적은 첫째도 엄마, 둘째도 엄마, 셋째도 엄마에 맞추어져 있다. 서울여대 총학생회가 미쳐 생각치 못한 부분을 덕성여대 학생들이 지긋이 알려 준다.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을 보듬으면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축제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한 쪽은 축제 자체에 함몰되어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실기를 범했고, 다른 한쪽은 축제를 나눔의 장으로 격상시키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한 쪽은 축제를 위해 청소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잠시(?) 내려 놓았고, 다른 한쪽은 그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풍성해질 있도록 축제를 공유하기로 했다.


2013년이 저물어 무렵 대학가를 중심으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적이 있었다.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불을 붙인 대자보 열풍은 비단 대학가 뿐만 아니라 사회를 아우르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가 묻고 있었던 것은 학우들과 사람들의 '안녕'이었다. 그는 투박하나 진솔한 목소리로 사회의 '안녕' 물었다.





나는 대학 축제와 관련된 이번 기사를 접하며 문득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생각이 났다. 당시 신드롬에 가깝던 대자보 열풍 속에서도 사람들 모두가 그에 동조하고 공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의 본분을 이야기하며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러는 색안경을 끼고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사안 동일한 현상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듯 각각이다축제와 맞물려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응하는 대학 학생들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다 둘의 차이는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갈린다그리고  극명한 차이가 비난과 찬사를 이끌어 내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젊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사회변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나는 믿는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항하는 젊은 청춘들의 의기와 패기, 뜨거움이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해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안녕' 물었고, 소외층과 사회적 약자의 '안녕' 물었으며, 이웃과 사회의 '안녕' 되물었다. 그들의 '안녕'은 '안녕'치 못한 사회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안녕들 하십니까?"


축제 시기와 맞물려 청소 노동자 노조 파업에 대응하는 서울여대와 덕성여대의 모습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안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는 지금 '안녕'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한가지는 내 주변에는 '안녕'한 사람보다 '안녕'치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의 '안녕' 살피는 젊은 청춘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점점 '안녕'하게 것이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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