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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강기훈씨 유죄라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나!

'유서대필 사건' 피해자 강기훈씨가 마침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확정받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던 지난 1991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해주고 그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처벌을 받은지 무려 24 만이다. 대법원 2(주심 이상훈 대법관) 어제(14) "강씨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 강기훈씨의 자살방조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991 대학가와 노동계는 용광로처럼 뜨겁게 닳아 올랐다. 곳곳에서 노태우 정권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뜨거움은 4 강경대 군이 국가폭력의 상징인 '백골단'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절정으로 치달았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급기야 분신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전국적으로 11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분신을 했다. 재야운동가였던 김기설씨 역시 중의 한사람이었다.


전국으로 '정권퇴진' 시위가 번져 나가자 노태우 정권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대학생들과 재야운동가들의 연이은 분신이 문제였다. 분신은 저항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방법이다. 분신이 잇따르자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국면을 전환시킬 묘수가 필요했다. 때마침(?)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 총장의 기자회견이 국면전환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김기설씨가 서강대에서 분신한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 죽음의 세력이 존재한다" 분신의 배후에 이를 조정하는 세력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홍 총장과 노태우 정권과 사전 교감이 있었는지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발언 이후 언론은 '배후음모설' 대대적으로 제기했고, 경찰은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며 수사에 착수했다.





이후 '유서대필 사건' 수사는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순풍에 돛단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찰과 검찰은 몸으로 움직였고, 과정에 국과수도 동참했다. 법원 역시 경찰과 검찰, 국과수가 합작한 날조극에서 강기훈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며 저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영원히 묻힐 같았던 희대의 조작극은 지난 2007 '진실화해를 의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의해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재심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했던 법정공방 끝에 마침내 어제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국가기관이 합심해 사건을 조작하고 개인의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국가폭력의 부당함을 바로 잡기까지 무려 24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강기훈씨의 무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격려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다. 당연한 반응들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며 땅에 정의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강기훈씨 개인적으로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낼 있는 의미있는 판결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강기훈씨가 그랬던 것처럼 필자 역시 전혀 웃을 없어 유감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조작극이자 날조극이었던 '유서대필 사건'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폭력으로 강기훈씨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24 동안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당시 수사를 진두지휘한 인물은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이었다. 그는 이후 서울지검 2차장을 거쳐 서울고검장으로 승진했고 2000년부터는 대법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대법관 퇴임 이후에는 2007 박근혜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까지 역임하는 법조계의 영향력있는 인사로 자리잡고 있다.

강기훈씨의 구속영장을 직접 청구하는 당시 수사를 일선에서 이끌었던 신상규 검사는 이후 서울지검 3차장을 지냈고, 2009년에는 광주고검장까지 승진했다. 2013 7월에는 무죄확정 사건 검사의 과오를 살피는 대검찰청 산하 사건평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수사팀에 있던 검사들 남기춘 검사는 검사장까지 지낸 변호사로 활동하다 2012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산하 클린정치위원장을 지냈으며, 곽상도 검사는 2013 대통령인수위원회에 발을 딛은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을 거쳐 현재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에 재직중이다.

1991 사건의 1 재판을 담당했던 서울형사지법 노원욱 부장판사는 2000 특허법원장을 지냈고,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관 윤영철 대법관은 2000 헌법재판소장까지 역임했다. 그리고 사건 당시의 법무부장관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그날 이후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던 강기훈씨의 삶은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악랄한 날조극을 공모했던 사람들은 너나 없이 국가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기가 막힌 대비다. 우리사회의 수준과 민낯을 보여주기에 이만한 대비도 없을 하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저들 자신의 과오에 대해 참회하거나 사과하는 이가 한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강기훈씨가 무죄를 확정받았음에도 웃지 않는 이유다.

부끄러움은 오직 인간만이 느낄 있다고 한다. 대법원 판결로 노태우 정권이 날조한 '유서대필 사건'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페이지라는 것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당시 사건에 공모한 사람들이 강기훈씨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조차 없다. 당시 강기훈씨의 유죄를 한 목소리로 외치던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

저들의 침묵은 저들 스스로 '비겁함' '양심없음'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과하라. 그리고 머리 숙여 사죄하라. 생물학적 인간으로서가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적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것이 강기훈씨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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