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27일 주당 근로시간 한도를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자 양대 노총은 일제히 비판적 메시지를 내놨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이 배제되고, 휴일 근무 수당 중복할증이 인정되지 않자 이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근로시간 단축 문제가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이후 5년 만에 타결된 이번 합의안이 노동시장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계기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날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아쉽게 생각을 하지만 일단 최장 노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가기 위한 단계적인 조치라고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 함께 더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합의 내용에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노동의 가치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노동계와 경영계 양측 모두의 불만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주당 근로시간을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시키는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일그러져 있는 노동 현실을 정상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산적해 있는 현안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특히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 비용 및 신규 고용 문제, 노동자의 임금 소득 저하, 비정규직 문제와 최저 임금 등과 연계되어 있는 사안입니다. 그런 이유로 완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기 노동이 초래하는 사회적 폐해를 상기한다면 이번 합의가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의미있는 결정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여야가 5년 만에 근로시간 단축에 합의한 날, 충남 서산에서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집배원이 자신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차 안에서는 번개탄이 발견됐고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망 경위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번 사건은 그동안 무수히 되풀이 돼 온 '집배원 사망 사건'의 재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소 업무 가중과 신상 문제로 힘들어 했다는 유족의 진술이 이같은 추론에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살인적인 노동 시간'을 예를 들 때 빠지지 않는 직종이 바로 집배원입니다. 과도한 장기 노동과 격무에 시달리는 집배원의 고충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상태입니다.
노동자운동연구소가 2014년 1월부터 2016년 4월까지 28개월간 9개 지방청 41개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집배원 183명의 근무기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주당 55.9시간, 월평균 240.7시간, 연평균 2천888.5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일반 노동자의 근로시간 2285시간(2014년 OECD 발표 기준)보다 600시간 이상 많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7년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전국 집배원 2천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배원들은 하루평균 10.9시간, 주당 55.2시간, 월평균 239.1시간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앞서 노동자운동연구소의 조사 결과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이같은 조사 결과는 집배원의 연이은 죽음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음에도 인력 충원과 근로시간 단축, 처우 개선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안타까운 죽음에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여론이 들끓고, 정치권이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서지만 실제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집배원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온지는 사실 꽤 오래 됐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2월 25일 취임식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희망 복주머니' 행사에서 집배원 박형동씨의 희망이 적혀있는 복주머니를 골랐습니다. 그 안에는 "우정사업본부는 비정규직이 가장 많이 근무하는 정부기관입니다. 비정규 상시 계약 집배원들이 똑같은 일을 하면서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없도록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길 부탁합니다"라는 쪽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비정규직 문제에 제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기 내에 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수 있도록 최대한 관심을 갖고 힘쓰겠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많다던 박 전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시간제 일자리가 증가하는 등 고용불안이 더 심화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박근혜 정부는 '공정인사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에 관한 지침' 등 이른바 양대 지침을 밀어붙이며 노동 조건을 악화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지난해 6월 12일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집배원을 직접 언급했습니다. 집배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예로 들며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위한 추경예산안 통과를 호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추경안은 정부안이 제출된지 45일만인 7월 22일이 돼서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추경안이 인사청문회 정국과 겹친 데다, 공무원 증원 숫자와 예산 규모 등에 대해 여야의 이견이 충돌하면서 표류한 탓이었습니다. 결국 추경안은 공무원 증원 규모를 줄이고 예산을 감액하는 진통 끝에 겨우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7년 9월까지 업무 중 사고, 과로로 인한 질병이나 자살 등으로 사망한 노동자가 무려 218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살인적인 스케줄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집배원의 위험천만한 노동 현실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수치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만약 정부가, 정치권이, 우정본부가 장시간 노출과 상시적 위험, 고용불안에 노출돼 있는 집배원들의 현실은 직시하고 즉각적인 대책을 마련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렵다. 이 아픈 몸 이끌고 출근하라네. 사람 취급 안 하네. 가족들 미안해."
서광주우체국 소속으로 15년동안 근무해온 집배원 고 이길현씨가 남긴 유서의 일부입니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몸이 완쾌돼지 않은 상황임에도 출근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2017년 9월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날은 그의 출근 예정일이었습니다.
근로시간 단축안이 국회에서 합의된 날 살인적인 노동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집배원이 또 다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씁쓸한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을까요. 이제는 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정부가, 정치권이, 우정본부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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