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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키는 대로 했을 뿐? 그런다고 범죄 사실이 사라지나?

ⓒ 오마이뉴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던 변창훈 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상황이 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동 등 보수언론은 검찰의 과잉 강압 수사에 촛점을 맞추며 문재인 정부의 과도한 적폐청산이 변 검사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논지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지난 7일 사설에서 "인터넷 댓글이 얼마나 대단한 문제이길래 이런 비극까지 불러와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라며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국내정치와 선거에 개입한 국기 문란 사건에 대한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역시 문재인 정부와 검찰을 싸잡아 강도높게 비난했다. 한국당 소속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이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통 공안검사로 신망이 높던 변창훈 검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며 "당장 죽음의 굿판을 멈춰라"고 목소리를 높인 데 이어, 정우택 원내대표는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일부 정치검찰에 의한 정치보복 수사로 현직 검사가 투신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이 사태의 추이에 대해 한국당은 일정한 입장과 함께 행동을 보일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권성동 의원은 "윤 지검장의 보복심리가 무리한 수사를 불렀고, 변 검사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본다"며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을 정조준했고, 정용기 원내수석대변인 역시 "윤 지검장은 일부 언론에서 정치적인 혹은 개인적인 보복의 우려를 전달하자 '그런 보복을 한다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고 했다"며 "고검 검사가 수사 중에 투신자살한 상황에서 묻고싶다. 윤 지검장은 깡패냐, 검사냐"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보수세력의 주장은 요컨대, 적폐청산이란 미명 하에 전개되고 있는 정치보복 수사가 유능한 공안검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얘기다.

검찰 내부에서도 강도높은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조선일보>는 8일 "검찰 내부서도 '이러니 정권의 忠犬 소리 듣는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수사가 과하다는 얘기가 검찰 안에서도 많았다. 이러면 검찰은 매번 정권의 충견(忠犬)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수도권 한 지검 평검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 "검찰 수뇌부가 정권 입김을 전혀 막아주지 않고 있다.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분개하는 또 다른 평검사의 입장을 옮기기도 했다.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느냐는 불만이 검찰 내부에서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적폐청산을 가장한 새 정부의 '전 정권 죽이기'와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만 살피는 정치검찰의 '보복수사'라는 보수진영의 프레임이 꽤나 날카롭다. 이 프레임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라는 검찰 내부의 비판과 결합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낸다. 시대적 요구인 적폐청산의 당위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방어진을 형성하는 탓이다. 게다가 상명하복의 권위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명령'과 '복종'은 아주 익숙한 논리다.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항변은 여기로부터 시작한다.

앞서 사건이 '묘하게 흘러간다'고 밝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하게 밝혀두지만, 변 검사의 죽음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변 검사가 개입돼 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방해 혐의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장호중 부산지검장과 이제영 의정부지검 형사5부장, 변창훈 서울고검 검사 등 국정원에 파견된 파견 검사들이 2013년 4월 압수수색에 맞춰 가짜 사무실을 심리전단 사무실인 것처럼 꾸며 놓고 검찰 수사를 방해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기본적인 얼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파견 검사들은 가짜 사무실에 허위 문서와 자료 등을 비치해 놓고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로부터 사회 공동체의 질서를 지켜야 할 검사들이 국정원과 함께 조직적으로 범죄를 공모한 것이다. 이 와중에 파견 검사들은 수사와 재판을 앞두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을 위해 진술 내용을 연습시키는 등 위증교사까지 했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짓밟고 헌정질서를 유린한 국정원 댓글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파견 검사들의 행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중대 범죄행위다.


ⓒ 오마이뉴스


파견 검사들이 저지른 범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수사와 재판에 제출된 녹취록을 조작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는 지난 8월에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재판부가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당시 검찰은 파견 검사들이 조작한 녹취록 원본을 확보해 증거로 제출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파견 검사들은 2014년 4월과 6월 열린 원 전 원장 재판을 앞두고 핵심 증인인 국정원 직원을 해외로 빼돌린 사실이 들통나기도 했다.


파견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자행한 불법 행위가 이처럼 부지기수다. 범죄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검사들이 외려 범죄 피의자의 구명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움직인 것이다. 그들이 기꺼이 '범죄의 바다'에 뛰어 든 까닭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권력 의지, 출세에 대한 욕망, 공안검사로서의 사명 등등. 그러나 그 어떤 이유를 들이민다 해도 그것이 파견 검사들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합리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혹자는 어쩌면 이를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조직문화 때문이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앞서 <조선일보>가 인용 보도한 검찰 내부의 비판 목소리가 여기에 해당될 테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한켠에는 이렇듯 변 검사를 향한 온정의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모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한 임수빈 전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 2012년 진보당 간사 재심에서 윗선의 지시를 거부하고 무죄를 구형했던 임은정 검사,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뚝심있게 밀어붙이다 찍혀나간 윤석열 당시 수사팀장처럼 소신과 원칙에 충실한 검사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변 검사의 자살이 청와대의 하명에 의한 정치수사 탓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반발하는 검찰 내부의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항변은 상부의 명령에 의한 범죄 행위를 옹호하는 타협가의 논리라는 점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 주장대로라면 나치나 일본제국주의, 크메르 루주 정권에 부역한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 반인륜적 만행의 책임이 명령권자인 히틀러와 군통수권자, 크메르 루주 정권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범죄에 가담했으면 죄질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여기에 동정이나 온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파견 검사들이 저지른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방해 의혹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제국주의의 '생체 실험',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 등은 모두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던 추종자들의 맹종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아니 그렇게 멀리갈 것 까지도 없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조작된 수많은 용공조작 사건은 어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검찰의 모습은 또 어떠했나.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터다. 그런데 정치보복이라 한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한다. 국가기관이 개입한 조직적인 범죄 앞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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