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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안철수의 노골적인 보수 행보가 의미하는 것

지난 대선 당시 보수표를 의식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우클릭 행보는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한때 새정치 바람을 등에 입고 중도진보 진영의 '희망'으로 우뚝 섰던 그였기에, 안 후보의 보수 행보는 진보적 성향을 지닌 유권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 후보가 보수 진영의 표를 많이 가져왔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단편적인 프레임으로 보수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에는 안 후보의 확장성에 한계가 명확했다.

사드배치 반대 입장에서 찬성으로 돌아서고, 햇볕정책 공과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안 후보의 정치 노선 변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안 후보에게는 국민의당의 존립기반이자 최대 지지지역인 호남 민심과 야권 지지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연 확장이 절실했음에도 안 후보가 대놓고 보수 행보를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안 후보의 어정쩡한 우클릭 행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중도진보 성향의 문재인 후보, 보수 성향의 홍준표 후보 사이에 끼여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지난 대선 패배가 안철수 대표의 '각성'을 이끌어 낸 것일까. 안 대표가 '확' 달라졌다. 보수 코스프레가 아닌 노골적인 보수 색채 강화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민심의 요체이자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정치보복이라 맹비난하는가 하면, 정체성과 노선의 뚜렷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른정당과의 연대·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호남 중진의원에게 "그 정도면 그런 정당에 계신 것이 무척 불편할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며 '나갈 테면 나가라'는 식으로 단호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모두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안 대표의 변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터다. 먼저, 더 이상 호남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거다. 호남은 오늘의 안 대표를 만들어준 실질적 동력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근거지를 찾고 있던 안 대표가 불과 몇개월 만에 정치의 중심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 지형이 180도 달라졌다. 20대 총선에서 안 대표와 국민의당에게 압도적 승리를 안겨주었던 지역 민심이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 총선 당시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겠다던 안 대표의 공언도 현재로서는 난망한 상태다.

그런 면에서 지난 대선은 안 대표에게 호남의 한계를 뼈저리게 맛보게 해준 경험이었을 터다. 정치 속설 중에 '호남만으로는 안 되지만, 호남이 없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호남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이 수사가 안 대표에게는 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개연성이 크다. 다시 말해, 안 대표가 '호남이 없어도 안 되지만, 호남만으로는 안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호남에서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고공행진 중이다. 설령 지지율이 떨어진다 해도 이미 등 돌린 지역 민심이 다시 안 대표에게 향할 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안 대표는 자신을 비판했던 호남 중진 유성엽 의원에 대해 끝까지 함께 가지 못하더라도 '내 갈 길을 가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또한 호남 중진의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바른정당과의 연대·통합의 끈도 한사코 놓지 않고 있다. 정체성과 노선의 차이, 지역 민심의 반발, 분당과 탈당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안 대표의 '마이웨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당내 반발과 민심 이탈을 감수하고서라도 호남을 뛰어넘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로 안 대표의 보수 행보는 차기 대권을 위한 대선 전략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대선 당시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공공연하게 안 대표 띄우기에 나섰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극우논객 조갑제씨는 "안철수 중도정권이 탄생하면 보수는 절반의 성공"이라며 "보수 진영은 홍준표 대신 안철수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안 대표를 밀어주기까지 했다. 보수의 궤멸로 마땅한 후보가 없는 가운데 나온 고육지책이었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안 대표에게 내재돼 있는 보수성을 그들이 꽤뚫어봤다는 의미도 된다.

보수진영의 몰락은 차기 대권을 꿈꾸고 있는 안 대표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남다르다. 안 대표 지지층이 호남을 기반으로 한 중도진보 성향의 유권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이미 안 대표에게 실망해 등을 돌린 상태다. 지난 대선은 이를 여실히 확인시켜 준 시간이었다. 이같은 현실은 누구보다 안 대표 스스로가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중도진보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다면 선택지는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다. 안 대표 스스로 보수진영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안 대표에게 우호적인 보수언론, 인물난에 시달리고 있는 보수진영의 현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본다면 보수정당인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그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일부일 터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통해 일차적으로 중도보수 통합의 물꼬를 트고, 자유한국당 내 비박세력과 민주당 내 비문 세력을 포함한 제3지대 보수개혁 정당을 만들어 한판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다당제와 반문연대, 동서화합을 통한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그럴듯한 구실도 있다. 제 코가 석자인 안 대표가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16일 덕성여대 특강에서 나온 안 대표의 발언은 이같은 추론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날 안 대표는 바른정당과의 통합과 관련해 "연대 내지는 통합으로 가는 것이 우리가 처음 정당을 만들었을 때 추구한 방향과 같다"며 통합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국민의당의 창당 정신이 개혁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를 아우르는 것이니만큼 바른정당과의 통합이 문제될 것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말이 좋아 개혁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결합이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정체성과 노선은 지향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당장 국민의당 대북정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햇볕정책에 대한 인식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다. 당의 구심이라 할 수 있는 호남 중진의원들과 당 원로들이 탈당과 분당까지 시사하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며, 예측불허의 생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안 대표의 노골적인 보수 행보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국민의당이 분열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오는 21일로 예정된 '끝장토론'이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극적인 타협의 가능성도 있지만, 안 대표를 향해 '저능아'라 독설을 날린 박지원 전 대표의 예측처럼 '개판'으로 끝날 수도 있다. 이래나 저래나 국민의당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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