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세기의 대결에서 인간 대표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패배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관과 감각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던 세간의 예상은 허무하게 빗나갔고 지구촌은 큰 충격에 빠졌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나노 공학, 로봇공학, 무인 산업, 3차원 인쇄,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산업혁명이 그 상징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시대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달라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내 보기에, 자유한국당이 딱 그렇다.
6일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 자리. 전희경 한국당 의원의 질의 순서에서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다. 전 의원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및 청와대 비서진을 겨냥해 '주사파, 전대협' 출신 운동권들이 청와대를 장악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전 의원은 임 실장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출신임을 지적하며 "전대협의 강령은 반미, 민중에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밝히고 있고, 청와대에 들어간 전대협 인사들이 이같은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 의원은 이어 "사회부총리는 더 심각하다. 이 분은 온통 반대한민국적인 주의와 주장으로 점철된 길을 걸었고, 국회에서 그렇게 많은 부적격 사유를 제시했음에도 임명이 강행됐다. 이 분이 교육을 틀어쥐고 있다"고 발언하는가 하면,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의 사고방식은 전대협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청와대에 있으니 인사 참사가 발생하고, 커피와 치맥만 하고 안보와 경제는 못 챙기는 것이다"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말인즉,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청와대에 입성해 있고, 좌파적 시각을 가진 인사가 정부에 기용됐기 때문에 국가 안보와 경제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말문이 막힌다. 이 나라 정치의 고루함을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3D 프린터로 하루 만에 집이 뚝딱 만들어지고, 인공지능 자율주행차의 상용을 눈 앞에 두고 있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국회는 여전히 과거의 유물인 '색깔론'이 활개를 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정치권, 그 중에서도 한국당 의원들의 인식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고 있다.
전 의원의 난데없는 색깔론 공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일까. 차분하게 질의에 응답하던 임 실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되기 시작했다. 임 실장은 "전 의원의 발언에 매우 유감이다"라며 "5·6공화국에서 정치군인이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언급한 그 분들이 전 의원이 말씀하신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 전 의원의 발언에 매우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토로혔다. 한순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이 깡그리 매도당한 것에 따른 격정일 테다.
왜 아니 그럴까. 그 시절 학생운동은 그런 것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맞선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체제에 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인식되던 시대에서, 학생운동은 어디까지나 불온의 상징이었고 박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구금당하고 고문을 받고 투옥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군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폭력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한열이, 박종철이, 강경대가, 김귀정이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 앞에 무참히 스러져갔다.
ⓒ 오마이뉴스
이 땅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과정 속에는 이처럼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당대인들의 처철한 사투가 녹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당 부분이 그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청춘들의 의기가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그들의 헌신과 투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치기가 만들어낸 실수와 과오에 대해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일궈낸 빛나는 성취까지 매도하고 폄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전 의원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전 의원의 주장대로 주사파, 운동권이 문제라면 청와대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한 건 국회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야당인 한국당과 바른정당 내부에도 과거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전 의원의 인식대로라면 현역인 김용태, 김영우, 하태경 의원 등은 물론이고 김문수, 이재오, 신지호, 차명진, 권영진, 정태근, 조해진, 진성호 전 의원 등 한국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인들과 원외위원장, 보좌관들 역시 사상검증을 받아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더 근본적으로는 전 의원이 몸담고 있는 한국당의 정치적 뿌리이자 사상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신랄한 비판과 검증을 피할 길이 없다. 한국당의 존립기반이자 근거지인 TK지역에서 '반인반신'으로 추앙받는 박정희가 사실은 남로당 활동 전력이 있는 '빨갱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박정희는 그 때문에 군사재판에 회부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전 의원의 논리대로라면 한국당을 지탱하는 절대적 존재인 박정희의 과거 빨갱이 전력부터 당장 문제삼아야 될 판이다. 종북, 빨갱이라면 가릴 것 없이 낙인을 찍어왔던 애국보수 한국당이 아니신가.
참담하다. 철지난 색깔론을 2017년 국회에서 다시 봐야하는 시대의 퇴행도 개탄스럽지만,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사람들의 수고와 열정까지 철저하게 짓밟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색깔론을 제기한 전 의원의 주장에서 그 어떤 근거도, 실체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독재권력의 전횡과 야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해 젊음을 불태웠다면 이는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일 터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그들의 분투가 매도와 폄하를 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문제 투성이의 청와대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각 부처에 하달을 하면서 하니까 지금 이 정부에 대해서 불신이 싹트는 것이다"
임 실장을 앙칼지게 몰아세우던 전 의원이 질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내뱉은 멘트다. 전 의원의 인식이 얼마나 끔찍하게 왜곡·편향돼 있는지가 저 발언 속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지율 10%대의 정당이 지지율 70%의 정부를 향해 '국민 불신'을 운운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독재정권의 정치적 후예들과 민주화를 이뤄낸 세력들이 나란히 국회에 앉아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일 터다.
2017년의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수십 년간 이루 말할 수 없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는 75년생으로 민주화 과정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전 의원에게도 해당된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자기 한 몸을 기꺼이 내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이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치열한 시대를 살지는 않았어도, 동참하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잊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의 수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선배들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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