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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선관위는 왜 투표용지를 미리 인쇄했을까?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행보가 요상하다. 다음달 4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투표용지 인쇄를 일부지역에서 이미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에 따르면 30일 서울 구로갑·을의 투표용지가 인쇄되기 시작했고, 경기 남양주와 수원 팔달, 안산 단원은 31일에, 의정부와 파주, 여주 양평은 내달 1일에 인쇄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야권연대가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선관위의 사전 투표용지 인쇄가 야권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선관위는 '투표용지 인쇄 시기는 후보자등록 마감일 후, 9일 이후에 인쇄하도록 한다'는 공직선거관리규칙 71 2항에도 불구하고 인쇄에 들어갔다. 이에 
야권과 시민사회는 규정을 무시한 채 사전 투표용지 인쇄에 들어간 선관위를 향해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관위는 논란이 거세지자 "인쇄시설 부족 등 선거관리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인쇄일을 변경할 수 있다" "해당 지역 선관위에서 위원회의 의결로 인쇄 시기를 결정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더민주의 인쇄 중단 요청과는 상관없이 인쇄 작업을 그대로 진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인쇄시설 부족과 선거관리의 지장 때문에 사전 투표용지를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는 선관위의 주장은 궁색하기 그지 없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공직선거관리규칙은 원활한 선거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다. 후보자 등록 마감 후 9일 이후에 투표용지를 인쇄하도록 한 것도 이를 충분히 고려한 사안이다. 즉 다음달 4일 이후에 투표용지를 인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선관위는 선거관리 지장을 우려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선관위가 논란이 불을 보듯 뻔한 사전 투표용지 인쇄를 강행할 것이었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반드시 제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공정성과 중립성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관위는 선거관리에 지장이 있다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표현으로 이를 대신하고 말았다. 공정성 시비를 선관위 스스로 자처한 셈이다.

문제는 또 있다. 선관위는 인쇄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투표용지 인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지난 18대 대선에서는 투표용지를 17대 대선과 비교해 일주일이나 뒤로 미룬 12 10일이 되어서야 인쇄를 했다.

당시 선관위는 "투표의 공정성 확보와 무효표 발생 최소화를 위해 인쇄 시기를 늦추기로 결정했다"고 공표했다. 이 장면은 선관위의 해명이 앞 뒤 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쇄 시설이 부족하다는 선관위의 해명은 일관성 없을 뿐더러 그들의 이중적 잣대를 드러내는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 연합뉴스



선관위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모든 선거를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선관위의 존재 이유는 첫째도 공정, 둘째도 공정, 셋째도 공정에 있다. 선관위의 책무가 선거의 공정성 확보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선관위가 계속해서 공정성 시비에 휘둘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선관위가 공정성과 중립성을 훼손한 경우만 해도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의 사이버테러 사건이다. 당시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보좌관이 저지른 디도스 테러에 선관위는 이해할 수 없는 대응으로 일관하며 논란을 부추겼다. 특히 투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투표소를 변경시키며 시민사회의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이 사건은 아직도 회자되는 선관위의 흑역사로 남아있다.

선관위는 이밖에도 야당에 제기된 선거법 위반 사례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부각시키거나 증거가 불충분한 과거 사건의 관련자료까지 검찰에 넘겨주는가 하면, 여당의 경우엔 전부 무혐의 처리를 내리며 계속해서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왔다.

이번 투표용지 사전 인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야권연대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뚜렷한 이유와 근거도 없이 투표용지를 미리 인쇄한 것은 여당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국가기관인 선관위가 자신들의 지위를 활용해 교묘하게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관권선거에 다름 아니다.



ⓒ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우리는 투표함 바꿔치기나 중복 무더기 투표, 관변단체를 동원한 조직적 투표 방해 행위, 금품 살포 같은 고전적인 방식만을 관권선거라 규정짓는 통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시대가 바뀌면 관권선거의 양태도 달라진다. 이미 그 끔찍한 참상을 지난 대선에서 혹독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시민의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가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 시민의 주권과 참정권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광경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민들이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를 걱정하고 선관위의 공정과 중립을 요구하는 이 기괴한 현실을 마주보고 있자니 현기증과 함께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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