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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황식 전 총리의 '신' 박비어천가

'충' '의'는 성리학이 특히 강조하는 이념이었으며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절대가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 대한 변치않는 충성심과 불의와 부정을 용납치 않는 의로움이야말로 유학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충'의 개념은 '효'와 함께 조선시대를 내내 관통했던 유교의 핵심 교리로 남게 됩니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왕조 오백년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충성'을 강조하는 관행이 아직까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두차례에 걸쳐 무려 30년 가까이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상명하복을 거스를 수 없는 절대가치로 여기는 군부에게 그 기간은 우리나라의 정치 관료 사회를 권위에 복종하고 절대권력에 충성하는 조직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10여 년의 짧았던 민주정부 집권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충성'을 강조하는 뿌리깊은 군 문화가 우리나라의 정치 관료집단 내에 자연스레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전쟁같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최상의 매뉴얼로 작동하는 '충성'의 개념은 국가와 국민의 개념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작동하는 보편적 정서의 범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란의 위급함에서나 발현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충성'의 개념이 활개치는 곳은 군이나 조직폭력배같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율이 요구되는 특수한 집단에서나 나타날 뿐 일반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조금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우리사회 내부에 강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의 구습이 정치와 관료집단에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임진왜란이나 일제로부터의 독립, 6•25 등의 국란상황에서 선조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지키고자 했던 '충성'의 개념을 우러러보며 고귀하게 여깁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존립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선열들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선열들이 보여주었던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마음은 이제 소개하려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지금 새누리당에서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가리기 위한 경선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충성'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언급한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차원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 측은 지난 5일 논평을 통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박심 공방'에  대해 (정몽준 의원이) '박 대통령을 돕기 위해 나선 김황식 후보의 충정'을 비난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서울시장 예비후보 경선에 뛰어든 이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출마를 권유했다고 밝히는 등 '박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는 김황식 후보가 '충정'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까지 박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선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마음이 떠올랐던 건 이 둘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충성의 대상은 '국가'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이 땅의 노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지 독재자 '박정희'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5공화국의 눈부신 경제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지 '권력자'를 위해서 자신들의 피와 땀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충성하는 자들은 언제나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국가'보다 '사람'에게, '민주주의'보다 '절대권력'에게 우선순위를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불행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자행된 국정원 등 다수의 국가기관이 개입된 선거부정사건이야말로 '사람'에게 충성한 결과가 어떤 비극으로 나타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겁니다.


'사람''국가'가 되지 않는 이상 '충성'의 대상이 결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충성', '충정' 등의 말은 '국가', '국민', '민주주의' 등의 숭고한 개념에 어울리는 단어이지, '사람'이나 '권력자'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닙니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게 된 배경이 박근혜 대통령을 돕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새누리당 김황식 예비후보의 발언은 그래서 적잖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그가 자신의 '충정'이 향해야 할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장의 눈과 마음은, 다시 말해서 서울시장의 '충정'은 온전히 천만 서울시민을 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새누리당 김황식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이런 기본적인 인식조차 갖추지 못한 채 서울시장이 되기 위해 출마했다면, 이는 천만 서울시민에 대한 모독이며 기만입니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