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방선거가 끝난 어제(5일) 아주 주목할만한 법원 판결이 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 김하영의 선거개입의혹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결과를 은폐•축소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항소심에서 법원이 원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의 선고에 이보다 더 적절한 시점이 있을까. 재판부의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쯤되면 이번 판결이 있었던 지난 5일이 금요일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아쉬울 지경이다.
본 글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는 이미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지난 대선의 불법부정에 대해서 수 십편의 글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판결과 관련해서는 지난 1심 판결 직후에 포스팅했던 아래의 글을 참고하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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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과 2심은 재판부와 선고일만 다를뿐 '국정원을 포함한 국가기관들은 지난 대선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절대명제 안에서 완벽히 동일하다. 아마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한 상고심에서도 이같은 상황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이변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먼저 시민들의 입장에서 이 사안을 살펴보겠다. 공직선거법•경찰공무원법 위반혐의와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재판중인 이 사안은 혹자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지루하고 따분한 정치공방일 뿐일지도 모른다. 지난 대선 이후 이미 1년 6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지 않은가. 따라서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수사가 일반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 문제와 관련해 시민사회와 종교단체, 대학교수 및 대학교, 심지어 어린 중고등학생들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했고,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사건의 진상과 책임자 처벌, 대통령의 책임을 물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심점이 되어야 할 야당은 자중지란과 만성적 무기력증에 빠져있은지 오래이고, 시민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몰랐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실체를 체험이 아닌 글로 배워온 세대들에게는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구체적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이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대로 글과 말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시민혁명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다양한 선언들이 실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지난 대선의 불법과 부정들을 확실히 단죄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다. 혹자들은 언론과 방송의 역할 부재를 그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4•19와 6•29를 이끌어낸 과거의 사례에 비추어볼 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보다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로 민주주의의 실체적 의미에 대한 시민들의 몰이해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시민들은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과 이것이 자신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국정원과 다수의 국가기관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며 민주주의를 기만하고 헌법질서를 유린했다는 사실과 개인적 삶 사이의 연관성과 구체적 접접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접접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희대의 선거부정사건에도, 경찰수사의 은폐와 조작에도, 정부여당의 수사방해에도, 사법부의 어처구니없는 판결에도 도무지 화를 내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시민들의 이런 속성을 뼈속까지 꽤뚫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임계점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거둬들여 왔다. 갖은 불법과 부정으로 언제나 여론의 질타와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저들이 '밀당의 법칙'에 정통한 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저들에게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공급해 주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이념과 지역갈등이라는 첨가제를 적절히 가미해가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식이다. 간혹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검찰과 경찰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법부까지 동원하면 되고, 그래도 안되겠다 싶으면 '꼬리짜르기'로 적당히 넘어가면 된다. 여론조작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체제의 근간을 흔들겠다며 현대판 '역모사건'을 진두지휘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구속된 이유는 허탈하게도 '대선개입'이 아닌 건설업자에게 청탁의 댓가로 받은 '금품수수'였다. 그리고 김용판 전 청장은 1심과 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와 같은 수순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면타개책이다.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들여다만 봐도, 관련사실의 인과관계와 여러 정황들을 합리적으로 의심만 해봐도 훤히 알 수 있는 정치권력의 불법과 부정을 용인하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양심과 원칙과 상식 등의 당위를 설명하는 것은 정말이지 피곤하고 또 피곤한 일이다. 정치권력의 불법과 부정을 용납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겁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따위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이를 꽤뚫어보고 있는 정치권력 사이의 오래된 싸움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정치권력에 유리한 싸움이다. 저들은 모든 것을 가졌고 이쪽은 가지지 못했다면 싸움의 유불리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이변이 일어날 수 없는 두가지 측면이 공존하는 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이를 증명하듯 정치권력은 김용판의 무죄를 통해 사람들을 마음껏 기만하며 조롱한다. 김용판의 무죄를 보고 사람들은 '소가 웃을 일'이라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조롱당하고 있는 것은 이 판결을 비웃고 있는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섬뜩하게도 이들은 모르고 있다. 지금 웃고 있는 자들은 저들이지 당신이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의 벽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돌아 선다. 백이면 백 이 길을 선택한다. 세상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배워왔고, 이런 선택을 순리라며 합리화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멀리는 전태일과 이한열이, 가깝게는 권은희 과장이 국가권력의 불의와 부정에 맞서 저항해 왔다. 물론 부정과 불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는 각자가 선택할 개인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거악에 맞서 정의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를 개인의 삶과 접목시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국가권력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 당당히 제목소리를 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삶과 유리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체험하고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적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김용판의 무죄 판결에서 보듯 국가권력의 이유있는 조롱과 기만으로부터 개인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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