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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일이다. 10월 16일 정국이 한바탕 크게 요동쳤다. 중국을 방문중이던 김무성 의원(당시 새누리당 대표)이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열린 조찬간담회에서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지게 될 것"이라며 개헌 논의 가능성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 의원은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해 정국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 의원이 불을 붙인 개헌 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거세게 반발하며 논란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김 의원이 하루 만에 사과하며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께서 이태리에 계시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죄송하다"며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는 우리 당에서는 개헌 논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김 의원의 발언이 나오기 열흘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며 개헌 선긋기에 나선 바 있다. 당시 김 의원으로서는 '현재권력'인 대통령과 맞서는 구도가 영 껄끄러웠을 것이다. 개헌 발언의 속내야 어찌됐든, 김 의원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양새가 연출됐기 때문이다. 당시 여권의 차기 대선 후보 1위를 질주하던 김 의원이 '무쫄'(김무성 쫄병)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둘러 고개를 숙인 이유일 터다.
'개헌'이란 이런 것이다. '미래권력'조차 '현재권력'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복잡미묘한 정치적 난제가 바로 개헌이다. 개헌 논의가 국민의 기본권, 지방분권 등이 아닌 권력구조 개편에 방점이 찍혀있다 보니 정치권의 당리당략과 이해타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그런 이유로 개헌은 여야 공히 그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번번히 정치논리에 가로막히며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후보 시절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역대 대통령들이 섯불리 개헌 논의에 나서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임기초 개헌 논의는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급속히 약화시키는 빌미가 될 수 있다. 레임덕을 초래하는 임기말 개헌 논의 역시 부담스럽다. 대통령이 개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건, 그래서 권력누수를 차단하기 위한 '본능'에 가깝다. 박 전 대통령의 '4년 중임제' 개헌 공약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년 연임 정·부통령제' 개헌 공약이 무위에 그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아주 특이한 케이스다. 집권한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개헌 논의에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6.1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던 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개헌 공약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이는 보수정권은 물론이고 임기를 1년 앞두고 '원포인트 개헌'을 전격 제안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해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문 대통령의 의지는 취임 직후부터 발현되기 시작한다. 지난해 5월 19일 여야 5당 원내대표와의 청와대 회동에서 개헌 의지를 피력한 데 이어, 지난 1월 10일 신년기자회견에서는 국회 주도로 개헌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히는 등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국회 주도로 개헌안을 발의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역대 대통령들이 하지 못한, 혹은 안 한 개헌 의지를 적극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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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의 발언이 '공치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5일 관계부처에 개헌안을 준비하도록 지시한 것만 보더라도 명확해진다. 문 대통령은 이날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최근 각 당이 개헌 의지를 밝히며 당론을 모으고 여야가 합의를 시작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아직도 원칙과 방향만 있고 구체적 진전이 없어 안타깝다"면서 정책기획위원회에 국회와 협의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개헌안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헌법 개정안이 개헌안 공고(20일), 국회 의결(60일 이내), 의결 후 30일 이내 국민투표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월 말까지는 국회에서 개헌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여야는 최근까지도 개헌안에 담을 내용을 두고 격렬히 맞서며 대치 중에 있다. 문 대통령이 정부 차원의 개헌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같은 현실을 감안한 결단으로 풀이된다. 국회에 맡긴 채 손 놓고 있다가는 '지방선거-개헌투표'가 물건너 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당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장제원 한국당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이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맹비난했고, 이종철 바른정당 대변인 역시 논평에서 "대통령은 '개헌 운전석'마저 탐내기보다 국회 존중을 앞세우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국민의당 역시 이행자 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문 대통령의 개헌안 시사는 독선과 오만일 뿐"이라고 날을 세웠다. 문 대통령이 국회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헌 발의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진영 논리에 빠져 개헌 논의를 사실상 방치해왔다는 비판도 가열차다. 실제 국회는 개헌특위를 꾸려놓고도 지난 1년 동안 공전에 공전을 거듭해왔다. 지난해 말 가까스로 특위 연장에 합의했지만 여야의 개헌안 도출은 여전히 난망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원인을 국회가 제공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더욱이 개헌은 지난 대선 당시 대선 후보들의 공통된 공약이었다. 심지어 홍준표 한국당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지방선거-개헌투표' 공약을 내세우기까지 했다. 대선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던 3월 15일에는 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의 원내대표가 회동을 갖고 '대선 당일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전격 합의를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세론에 맞서기 위해 '반문연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혼자 개헌을 반대하고 있다'며 맹공을 펼친 것도 그들이었다.
그러나 개헌에 소극적이라며 문 대통령을 거세게 몰아붙였던 보수야당은 이제 그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다.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개헌의 당위를 역설했던 그들이, 자신들의 공약이기도 했던 '지방선거-개헌투표' 약속을 지키려는 대통령을 향해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 '의회에 대한 도전', '대통령의 과욕', '독선과 오만' 등의 수사를 동원해 총공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개헌 전도사'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높이던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1년 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당시 보수야당이 '문재인 대세론'을 깨트리기 위해 한목소리로 개헌을 부르짖었다면, 지금은 다분히 문재인 정부를 흔들기 위해 개헌을 반대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개헌을 둘러싼 논쟁의 이면에 보수야당의 뿌리깊은 '반 문재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30년 묵은 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현재 정치권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개헌에 소극적이던 과거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는 헌법개정에 적극적이다. 임기 초임을 감안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보다 더 기이한 것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민의를 대변하는 공당이 자신들의 공약과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이나 사과조차 없다. 선거 전이냐 후냐에 따라 당론이 180도 달라지는 이율배반을 부끄러하기는커녕 외려 대선 공약을 이행하려는 대통령을 맹렬히 성토하고 있다. 대한민국 의회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한심하고 부끄러운 정치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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