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뇌물을 건넨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재판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항소심 재판을 담당했던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 정형식 부장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글이 300건이 넘게 게시됐다. 정 판사에 대한 특별감사를 요청하는 청원에는 하루 만에 15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런가 하면 이 부회장 석방 관련 기사에는 재판부의 판결을 비판하는 글들이 도배를 이루고 있다. 국민의 법 감정에 어긋나는 비상식적 판결이라는 지적이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은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은 각각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는 판단을 내린 사법부의 결정이 매우 안타깝다"(민주당 박완주 수석대변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판결"(국민의당 김근철 대변인), "'이재용 구조대'를 자처하면서 법 상식을 짓밟은 법원을 강력하게 규탄한다"(정의당 추혜선 수석대변인)는 비판적 논평을 쏟아냈다.
법조계 안팎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분출되고 있다.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은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부회장에 대한 판결은 겉으로는 유죄 판결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정농단에 대한 완벽한 면죄부를 내려줬다"고 꼬집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이번 판결은 평등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적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이 부회장을 기소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편파적이고 무성의한 판결"이라고 반발하며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반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보수언론은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5일 페이스북을 통해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있게 판결한 항소심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며 재판부의 판결을 높이 평가했고, 같은 당 김진태 의원도 페이스북에 "축, 삼성 이재용 석방,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도 기대된다. 그래도 아직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라고 적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바른정당 역시 유의동 수석대변인 명의로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논평을 내놨다.
보수언론은 보다 노골적이다. 그들은 "이재용 사건, 피해자를 범죄자 만든 것 아닌가"(조선일보), "이재용 집유...특검 여론수사에 법리로 퇴짜놓은 법원"(동아일보), "이재용 집유...법리와 상식에 따른 사법부 판단 존중해"(중앙일보), "이재용 항소심 석방...'묵시적 청탁' 조차 없었다"(세계일보), "특검의 '누더기 기소'에 제동 건 이재용 2심 재판"(한국경제), "이재용 이제는 앞만 보고 뛰어라"(서울경제) 등의 사설을 통해 재판부를 적극 옹호하며 이 부회장을 기소한 특검을 강하게 비판했다.
ⓒ 오마이뉴스
진영 논리에 따라, 가치 판단에 따라 2심 판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제각각이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일반인들의 법 상식과 그들 세계의 법 상식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역대급 쓰레기 판결"(이정렬 전 부장판사),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김진태 의원) 등의 극과 극의 상반된 반응이 터져나오는 이유일 터다.
어떤 세계에 사느냐에 따라 법은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적용된다. 라면 24개를 훔친 생계형 절도범에게 징역 10개월의 실형이 선고되는가 하면, 36억원의 뇌물과 국회 위증, 횡령 혐의가 있는 대기업 총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다. 아직도 '이재용'이 살고있는 세계의 법과 일반 국민이 살고 있는 세계의 법이 동일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외계인 둘 중의 하나다. 이번 판결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게 나오고 있는 실질적인 배경이다.
사실, 재판 결과보다 기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이 부회장 석방에 대한 보수진영의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 그렇다. 이번 판결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재판부가 이 부회장이 '피해자'라는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강요와 요구에 의해 뇌물을 건넸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결국 이번 판결의 핵심은 재판부가 이 부회장을 '피해자'로, 박 전 대통령을 '가해자'로 규정했다는 것에 있다.
이 부회장의 석방을 환영하고 있는 보수언론과 한국당 등 보수진영의 반응이 의아한 것은 그래서다. 주지하다시피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은 '뇌물죄'를 놓고 치열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가 강요와 겁박을 인정하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박 전 대통령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회장 석방이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의문은 이 지점에서 극대화된다.
2심 판결이 나오자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은 이 부회장을 '피해자'로, 박 전 대통령을 '가해자'로 묘사하는 논지의 사설을 약속이나 한듯 쏟아냈다. 박 전 대통령 탄핵과 재판 과정의 부당성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한국당 역시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재판부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5일 법원 앞에는 '태극기부대'로 추정되는 시민 수십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이 부회장의 석방을 열렬히 환호하기도 했다.
황당하다. 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그동안의 행태대로라면 보수언론과 한국당, 그 중에서도 친박들은 박 전 대통령을 가해자로 만든 재판부를 맹렬하게 성토해야 할 터다.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보수단체는 당장 법원 앞으로 달려가 대규모 규탄대회라도 펼쳐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영 딴판이다. 박 전 대통령을 가해자로 만든 재판부의 판결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이번 판결이 박 전 대통령 재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일이 아님에도 기뻐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2심 판결의 의미를 정녕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가. 박 전 대통령을 마음 속에서 지우기라도 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일부터 다시 박 전 대통령 구하기에 나서기라도 할 참인가. 요지경이 따로 없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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