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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원세훈 판결, 기억해야 할 한가지는

이틀 전 포스팅한 글에서 나는 추석연휴기간에 만기출소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국정원 선거개입 1심 공판 결과에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다. 국가기관의 공신력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이 이루어질리도 없거니와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불구속 수사방침을 정했던 그 무렵에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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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불구속 수사방침이 정해졌던 작년 6월 12일에 포스팅했던 글의 일부를 옮겨 보겠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수사의 핵심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중략)...그러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불구속 수사를 받게됨으로써 그에 대한 수사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적용하는 선에서 일단락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필자가 예상했던 그대로 법원은 어제 1심 공판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행위가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며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판단해 징역 2년6월과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했다.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기상천외함이 떠오르는 법원의 이번 판결이 정치권력에 대한 굴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신줄 놓은 대한민국 국가기관의 현실과 비루한 정치권력의 속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수순이고 자연스런 귀결이다.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었던 만큼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일말의 분노조차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의당 분노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깊은 무력감이 대신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사건에 분노하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갉아먹고, 시민들의 권리와 권익을 심각하게 침해했음에도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분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정원의 대선불법개입 사건과 관련해 정부와 집권여당을 규탄하고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거리에서 촛불을 환히 밝혔다.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밝혀지는 불법부정선거의 흔적들에 치를 떨며 민주주의 회복과 헌법가치 수호를 위해 당당히 싸워 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법원의 재판 결과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국기문란의 선거범죄가 정치권력과 이에 굴복한 검찰과 사법부에 의해 진실에서 한참이나 멀어졌기 때문이다. 재판의 결과에 만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응징하기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분노로 시작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오랜시간을 거쳐오는 동안 탄식과 자조, 아쉬움과 실망, 낙담으로 바뀌어 갔다. 이 감정의 끝자락에는 깊디 깊은, 지독한 무력감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 무력감은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앗아간 주범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력은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투지와 저항의식을 제거시키기 위해 무력감을 유발시키는 방법을 즐겨 사용해 왔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신군부 시절 수도 없이 조작된 용공사건도 결국 무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었다.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개인은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로 무력감에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시민통제를 위한 통치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또 없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은 국가폭력이 사법폭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런 면에서 법원의 이번 판결로 현 집권세력이 얻게 될 최고의 전리품은 지긋지긋한 정통성 시비를 종식시킬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국정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그 부당함에 줄기차게 저항해 온 사람들이 받게 될 무력감이다.


국정원 사건이 터진 건 2012년 대선무렵이었다. 그동안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청와대와 집권여당의 찰떡공조 속에 진실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하나 둘 지쳐만 갔다. 당연하다. 무려 2년에 가까운 시간, 사람들이 지치고 피로해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전모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수많은 시민들의 저항의식이 없었다면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이 불의한 시대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재판대에 세우고 국정원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얻어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인 것이다. 불의에 맞서고 부당함을 파헤치고 진실을 밝혀내려고 애써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마저도 가능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법판결사의 수치와 치욕으로 기록될, 어제의 썩어빠진 재판결과가 아니라 이 척박한 땅에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력감에서 벗어날 것, 그리고 기억하고 행동할 것. 이는 국정원 불법대선개입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나아가 불의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한 열쇠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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