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얘기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얼마 뒤인 2000년대 초반 정치 개혁의 바람을 타고 '당내 민주화' 운동이 정치권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당 개혁은 당시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었다. 3김 시대가 저물어가던 그 무렵은 오랫동안 이 땅의 정치를 짓눌러왔던 제왕적 정치 풍토가 김대중-이회창 1인 보스 시대의 종언과 함께 마지막 숨을 고르던 참이었다.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과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 '당내 민주화' 바람이 가열차게 일어났다. '천정신'(천정배, 정동영, 신기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의 정풍운동과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으로 대표되는 '수요모임'이 당내 정당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의 개혁 바람은 이후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민주당은 완전한 당내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상명하복의 1인 보스 체제를 털어내며 정치 개혁의 물꼬를 텄다.
반면 한나라당은 제왕적 시스템에서 탈피하는 데 실패한다. MB와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나라당은 '친이-친박' 체제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고, 이 구도는 이후 10년 넘게 당의 헤게모니 싸움을 이끌게 된다.
2000년대 초 '수요모임'으로 대표되던 한나라당 내 개혁소장파들은 당내민주화를 요구하며 강하게 쇄신의지를 피력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한나라당은 친이와 친박 간의 골육상쟁의 피 터지는 권력쟁탈전을 이어가게 된다 .
2008년 총선 당시 친이에 의한 친박 공천학살, 2012년 친박에 의한 친이 학살, 2016년 살생부 파동 등이 연거푸 발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당 개혁을 외치던 소장파의 목소리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이제 저 당에서는 당내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소장파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랫동안 당권 경쟁에 노출되는 사이 정치 개혁의 당위와 의지 자체를 상실해버린 탓이다.
한국당 초선의원들이 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수대통합과 인적혁신의 길'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황교안 대표가 밝힌 보수통합론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며 당 중진 인사들의 험지 출마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성명서의 내용 중 일부를 옮겨본다.
"오늘로 제21대 총선이 161일 남았다. 내년 총선에 국민이 거는 기대는 혁신이다. 반칙과 특권이 난무하고 민생은 철저히 외면당하는 나라답지 않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라는 국민의 바람이자 명령이다"
"그 시작이 바로 보수대통합과 인적혁신이다. 한국당 초선의원들은 황교안 대표가 제시한 보수대통합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향후 보수대통합의 길에 밀알이 되기로 결의했다"
"총선승리와 수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해왔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아름다운 자기 희생에 앞장서야 한다"
"그 흐름의 물꼬를 트기위해 누군가의 헌신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선배 의원님들께서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위해 큰 걸음걸이를 보여주길 바란다. 국지전에서의 승리가 아닌 당과 국가를 구하는 수도권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서 승전보를 전해주시길 촉구한다"
"지금껏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던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좀 더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한 점도 깊이 반성한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우리 모두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초선의원들도 주저하지 않고 동참하겠다"
이러쿵 저러쿵, 구구절절 많은 것을 담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요컨대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반드시 보수대통합을 이뤄내야 하며, 그를 위해서 당 유력인사들의 불출마 및 살신성인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다.
참 역겹다. 비겁하고 파렴치하다. 도대체 유권자를 뭘로 보고. 저들의 의도는 "오늘로 총선이 161일 남았다"는 부분에서 백일하에 드러난다. 한마디로 총선이 없었다면, 이 따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초선 의원들은 당의 자산이자 미래다. 당 개혁의 시발점이며 혁신의 동력이다. 그런데 그간 한국당 초선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국정농단과 박근혜 탄핵으로 당이 풍비박산 날 때, 대선과 지방선거 참패로 당이 존폐 위기로 내몰릴 때, 계파 청산과 인적 쇄신, 정당 개혁 요구가 빗발칠 때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
인두껍을 썼다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그들의 침묵과 외면, 자리 보전을 위한 계파 줄서기 행태가 오늘의 한국당을 만든 실질적인 요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적쇄신과 혁신을 요구하려 했다면 진작에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국정농단-탄핵 사태 때, 대선과 지방선거에 참패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어야 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한국당의 전면적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봇물처럼 솟구쳤을 때조차 저들은 당 지도부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도 총선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혁신과 쇄신을 말하고 있다. 정치 도의도, 부끄러움도 없다. 이들의 성명서가 비겁하고 무능하며 치졸해 보이는 이유다.
참, 구질구질하다. 4년 내내 누릴 것 다 누리고 쳐 '아닥'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보수대통합과 인적혁신이라니. 차라리 공천 때문에 황 대표에게 줄을 서는 것이라 말하라. 정치판이 아무리 막장이 됐기로서니 최소한 염치는 있어야 한다. 벼룩에게도 낯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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