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김기식', 저기도 '김기식'이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둘러싼 논란이 수드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대 국회의원 시절 당시 정무위원이었던 김 원장이 피감기관 예산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는 것이 논란의 시발점이다. 야당은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은 김 원장의 해외 출장을 문제 삼고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김 원장을 뇌물·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논란이 커지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금융계의 저승사자라 불리는 김 원장을 통해 금융당국과 금융계 전반에 걸쳐 만연돼 있는 무능과 부패, 불공정, 편법 행위 등을 쇄신하려던 계획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김 원장의 해외 출장이 적법한 공무 출장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임명 철회는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야당의 공세가 워낙 강경한 데다 여론도 심상치 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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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되고 있는 해외 출장은 총 3건이다. 김 원장은 2014년 3월 한국거래소 예산으로 우즈베키스탄을, 2015년 5월 우리은행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지원으로 각각 중국과 미국·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한국당 등은 이를 피감기관의 로비에 따른 '대가성 외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김 원장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공적인 목적의 출장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김 원장은 특히 대가성 외유라는 야당의 공세에 적극적인 방어논리를 폈다. 출장 이후 해당 피감기관에 어떠한 특혜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KIEP의 유럽지부 설치 검토 차원에서 이뤄진 유럽 출장의 경우, 상임위에서 예산 삭감과 지부 설립 불승인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대가성이 없다는 김 원장의 해명이 일견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 원장 스스로 인정했듯 직무연관성이 있는 피감기관 돈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것 자체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그동안 정치권과 기업, 금융계 등의 불법·편법, 불공정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 2014년 국정감사에서는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에게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기업과 그것을 심사하는 직원의 관계에서 이렇게 기업의 돈으로 출장 가서 자고, 밥 먹고 체재비 지원받는 것이 정당합니까?"라며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는 국회의원의 해외 출장을 거세게 비판한 적도 있다.
더구나 김 원장은 부정한 청탁과 접대 문화를 근절시켜야 한다며 '김영란법'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랬던 그가 피감기관 예산으로 해외출장을 3차례나 다녀왔으니 실망과 질타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해외 출장 논란의 책임이 다름 아닌 김 원장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 원장의 부적절한 해외 출장과는 별개로 몇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논란의 본질과는 다르게 국면이 흐르고 있는 탓이다. 먼저 김 원장 해외 출장의 위법성 여부다. 현재 한국당 등은 김 원장을 뇌물·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이에 대해 노회찬 '평화와 정의 모임' 원내대표는 10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비록 피감기관이라 하더라도 관련된 정책 등을 살펴보기 위한 공무를 위한 출장이었다면 적절성의 문제가 남지 그것이 위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특혜나 대가성이 없었다면 위법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야당과 보수언론이 김 원장 의혹을 보좌진의 성별과 연계시켜 확대시키고 있는 것 역시 생각해 볼 문제다. 주지한 것처럼 논란의 핵심은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은 해외 출장의 적절성 여부이지 동행한 보좌관의 성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당과 보수언론은 김 원장을 수행한 보좌진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본질을 심각하게 호도하고 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9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당시 수행한 여비서는 9급 정책비서가 아닌 인턴 신분이었다. 이 인턴은 '황제 외유' 수행 이후 9급 비서로 국회 사무처에 등록됐고 6개월만에 7급 비서로 승진을 했다"고 공세를 폈다. 김 원장과 보좌진 사이에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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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언론 역시 '여비서'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기사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보수언론은 '김기식 원장의 수상한 여비서'<조선일보>, '김기식 황제 외유 동행, 여비서 아닌 인턴...이후 초고속 승진'<중앙일보>, '김기식 여비서 의혹에 조목조목 반박'<동아일보>, '김기식 동행 여정책비서는 20대 인턴'<문화일보>, '김기식 여비서 출장 뒤 7급 초고속 승진, 도대체 무슨 일?'<매일신문> 등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을 앞다투어 내보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민주언론시민연대>는 9일 "조선일보. TV조선, '로비성 외유' 지적에 왜 '비서 성별' 부각하나"라는 제목의 방송 모니터에서 "언론은 타탕한 근거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의혹을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TV조선, 그리고 채널A가 '김기식 금감원장 해외 출장 의혹'을 제기하면서 '여비서 대동'이란 정보를 유독 부각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보수언론의 보도가 논란의 본질과는 상관 없는 황색 저널리즘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야당 국회의원들은 '과연 떳떳한가' 하는 점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으로부터 식사와 교통 등의 편의를 제공받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 기간에 피감기관이 제공하는 향응 접대를 받아 논란이 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출장이 문제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11일 YTN라디오 <출발 새아침> 출연해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들도 상당수 이렇게 비슷한 여행을 갔던 분들이 꽤 있다. 17·18·19대 그때까지 보면 전체 국회의원들의 1/3은 이렇게 갔다 왔다"면서 야당의 대응이 지나치다고 성토했다.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공을 펴고 있는 야당 역시 외유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실제 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해외 출장 사례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9일 공개된 'KIEP 출장 보고서'에 따르면 강효상·최경환 한국당 의원이 2016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4박 6일동안 영국 런던을 다녀온 것으로 확인됐다. KIEP는 강 의원의 항공료 738만4천800원을 포함해 총 1천8백여만원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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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에는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의 과거 해외 출장 사례가 불거져 나왔다. 제윤경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김 원내대표가 지난 2015년 한국공항공사를 통해 두 차례 캐나다와 미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했다. 제 대변인은 특히 "김성태 원내대표의 두 번의 출장은 출장국가만 같은 것이 아니라 국제민간항공기구 방문과 스미소니언 방문으로 출장 주요 일정이 완벽히 동일하다"면서 "김기식 금감원장에 대한 비난의 기준으로 보자면 최소한 김성태 원내대표야말로 피감기관을 통한 해외 출장이었고, 갑질의 최정점에 있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힐난했다.
한국당은 즉각 반발했다. 신보라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김성태 원내대표의 출장은 김기식 원장의 출장처럼 피감기관을 앞세운 '나홀로 외유성 출장'이 아니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공항주변지역 고도제한 완화를 협의하고 국토부 숙원사업인 국립항공박물관 건립을 위한 출장이었음을 밝힌다"고 반박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당의 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파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는 데다가, 둘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감기관 예산으로 해외 출장을 다닌 국회의원들이 상당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는 김 원장의 해외 출장 논란이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특권에 익숙해진 국회의 잘못된 문화와 관행의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과도한 특권과 특혜를 무비판적으로 누려온 국회의원의 빗나간 행태가 이번 논란을 촉발시킨 실질적인 배경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야당과 보수언론은 이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은 채 오직 '김기식 때리기'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피감기관의 예산으로 해외 출장에 나선 김 원장의 행위가 부적절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터다. 금감원장은 금융기관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만큼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자리다. 비판을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김 원장을 향한 비판과는 별개로 야당과 보수언론의 문제 제기가 외유 논란의 본질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지는 지극히 의문스럽다. 특히 야당의 무차별적인 비판이 온당한지는 진지하게 따져볼 일이다. 적어도 국회의원 외유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야당도 비켜갈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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