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이뉴스
"홍준표 대표 같은 경우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가 좀 심한 것 같더라구요. 8.15 경축식 보도하면서 촛불혁명, 촛불잔치 같다, 그게 완전히 촛불 당시의 정신적 충격, 두려움 이런 게 상처로 남아서 생기는 게 외상 후 스트레스 인데 그게 좀 강한 것 같아요. 여전히 거기에서 못 헤어나오고 있는."
지난 2017년 8월 16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발언 중 일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촛불기념식 같다"고 꼬집자 노 원내대표가 이를 강하게 비꼰 것이다. 한마디로 홍 대표가 '촛불혁명'의 트마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홍 대표는 전날인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대 정부는 모두 집권 후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가 경축일 행사를 하는데 이 정부의 오늘 8.15 기념식은 8.15 기념식이라기보다 촛불승리 자축연이었다.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이 8. 15 경축사에서 '촛불혁명'을 국민주권 회복의 과정으로 치켜세우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이다.
노 원내대표의 당시 진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일까. 홍 대표가 9일 다시 한 번 '촛불'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표시했다. 검찰이 이날 이명박 전 대통령을 기소하자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실패한 것은 좌파들이 주도한 촛불집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음은 홍 대표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의 일부다.
"2008.봄 압도적 표차로 정권을 잡고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양보한 것을 구실로 한미 FTA를 반대하면서 광우병 괴담으로 좌파들은 광화문에서 촛불로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MB 정권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아침이슬 운운하면서 허위와 거짓에 굴복하는 바람에 집권기간 내내 흔들렸습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권도 100프로 국민통합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로 좌파 눈치보기에 급급하다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광화문에서 좌파들의 주도로 촛불을 든 세력들에 의해 탄핵되고 감옥 갔습니다."
"오늘 MB도 기소된다고 합니다. 10년전 경선때 앙금을 극복 하지 못하고 서로 집권기간 내내 반목하다가 공동의 적에게 똑같이 당한 것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데 아군끼리 총질하고 싸우다가 똑같이 당한 것입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글 곳곳에 투영돼 있는 것처럼 '촛불', '좌파'에 대한 홍 대표의 인식은 비판의 수준을 넘어 거의 '증오'에 가깝다. 그는 촛불집회를 깨어있는 시민들의 주체적·자발적 행위가 아닌 좌파세력의 선동에 의한 대규모 군중집회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 폐습과 불의에 맞서려는 시민들의 집단 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홍 대표가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을 '적'이라고 명시한 부분이다. 이를 통해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홍 대표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촛불집회를 무도한 권력에 맞서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가치를 회복시킨 시민운동이 아니라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좌파의 책동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촛불 컴플렉스가 있다 하더라도 촛불시민을 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시쳇말로 나가도 너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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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원내대표의 표현을 빌자면 홍 대표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 심히 우려스러운 이유일 터다. 왜 그럴까. 홍 대표는 2008년 건강주권을 지키기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과 2016년 겨울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던 시민 모두를 적으로 규정했다. 전세계의 극찬을 받았던 평화적·민주적 시민혁명을 폄하한 것도 모자라 아예 시민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홍 대표는 비단 촛불시민들만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이명박·박근혜 정권 몰락의 책임을 촛불시민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박 전 대통령 탄핵과 이 전 대통령의 구속 수사를 찬성하는 절대다수 시민 역시 적으로 돌려 세웠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갈망하는 시민의 선의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홍 대표의 무모함은 문 대통령과 비교하면 더욱 도드러진다. 지난 대선에서 41.08%를 획득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70% 안팎을 기록 중이다. 단순 계산해도 문 대통령 지지도가 대선 당시보다 30% 가까이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지역과 연령, 이념 성향에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구 경북과 60대 이상의 보수층을 제외하면 대부분 70%가 넘는 고른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도보수층과 무당층의 상당수가 문 대통령 지지로 돌아섰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반면 한국당의 정당지지율은 조사 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20% 안팎에 그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홍 대표가 획득했던 24.03%보다 조금 하락한 수치다. 한국당은 텃밭인 대구·경북과 전통적 지지세력인 보수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탈권위, 적극적인 소통 행보, 뛰어난 공감능력 등을 바탕으로 외연확장에 성공한 문 대통령과 달리 민심과 유리된 잇따른 행보로 한국당이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당이 얼마나 시대흐름과 동떨어진 행태를 보이고 있는지는 적폐청산에 대한 입장만 보더라도 여실히 드러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적폐 청산을 위한 전 정권 수사 찬성 여론이 무려 70% 가깝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당은 이를 '정치보복'이라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적폐청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시대흐름과 괴리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인식하는 여론과 한국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당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아주 남다르기 때문이다. 국정농단과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의 지지율은 20% 안팎의 박스권에 갖혀 있다. 합리적 보수층과 무당층이 빠져나가고 충성도 높은 지지층만 남은 셈이다.
문제는 그것에만 의지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외연확장은 물론이고 보수재건 역시 난망하기 때문이다. 한국당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처절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당의 구조와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혁신시켜야만 한다.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좌우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보수의 가치와 철학을 재정립하는 것 또한 시급하다. 무엇보다 당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전략과 정책으로 정부여당에 맞서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국당에 실망한 합리적 보수층과 무당층을 다시 견인해 올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한국당에서 그런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보수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막말과 돌출 언행으로 구설에 오르는가 하면 급기야 '촛불시민이 적'이라는 제1야당 대표의 황당한 인식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홍 대표의 이름이 부각될수록 정작 당 안팎에서는 깊고 짙은 한숨이 터져나온다. 지방선거가 코 앞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헛발질도 이런 헛발질이 또 없다. 괜스레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최대의 적은 홍준표"(정두언 전 의원), "홍준표 당대표 10년 했으면 좋겠다"(이상민 민주당 의원) 등의 냉소가 터져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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