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11월 14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일원에서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숭모제와 박정희 역사자료관 기공식, 대한민국정수대전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남유진 당시 구미시장, 김익수 구미시의회 의장, 김관용 경북도지사, 자유한국당 백승주·장석춘·이철우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김태환·임인배 전 의원과 박사모 회원, 시민 등이 참여해 박 전 대통령 탄생을 기렸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각 생가 입구에서는 구미참여연대와 민주노총 구미지부 등 시민·노동단체 회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구미시가 2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생가 인근에 건립할 예정인 '박정희 유물전시관'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추모와 비판.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공산화를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자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위대한 지도자'라 추앙받는 한 사람이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악명높은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다.
헌정사상 최초로 삭발을 감행한 제1야당 대표로 기록될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박정희의 치적을 치켜세우는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에 대한 황 대표의 남다른 애착은 5·16 쿠데타에 대한 평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2009년 저술한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서술했던 그는 총리 시절에도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를 묻는 질문에 "답하면 논란이 생긴다"며 두루뭉술 넘어간 바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는 법적·역사적·학술적으로 평가가 이미 명확히 내려진 사안이다. 이를 '혁명'으로 표현하고, 쿠데타라 답하지 않은 박정희에 대한 황 대표의 인식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는 방증일 터다.
17일 국회에서 열린 '제2기 여성정치아카데미 입학식'에서 나온 황 대표의 발언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황 대표는 이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여러 논란이 있지만, 굶어죽던 사람들이 많을 때 우리를 먹고 살게 한 리더"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어 "좋은 분이 리더가 될 때 나라의 번영과 발전, 국민들의 행복, 안전과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이라며 "만약 우리가 (북한처럼)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먹고 살기도 힘든, 인간답지 못하고 인권이 없는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많는 사람들에게, (특히 60~70년대의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획기적인 경제개발계획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해 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찢어질듯 가난했던 궁핍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준 인물이자, 서민들의 애환을 아는 소박하고 소탈한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를 치켜세우는 이들이 내세우는 일관된 주장이다. 황 대표의 이날 발언도 그런 맥락일 터다. 경제성장 신화의 주역으로서 박정희의 공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박정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공적이 있는 반면 그 역시 과오가 있다. 분명한 것은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동시에 기록될 때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어떨까.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었다. 박정희 사후 다시 한 번의 군부 쿠데타로 군출신 대통령이 12년 동안 권력을 잡았다. 박정희와 그를 추종하던 정치적 후예들이 집권한 기간만 무려 30년에 달한다.
3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독재의 시대였다. 정치·사회·문화·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재자의', '독재자에 의한', '독재자를 위한' 사상적·물리적 통제가 가능했다.
실제 그랬다. 박정희 체제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어떤 식으로든 용납되지 않았다. 사법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기억되는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수많은 용공조작사건이 그 때 자행됐다. 그로 인해 박정희 독재에 맞서 저항했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탄압을 받아야 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를 욕하거나 비난했다는 이유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감금과 고문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은 헌법 위에 군림했던 박정희가 곧 '국가'였던 시대였으며, 독재 권력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심장을 갉아먹던 서슬 퍼런 폭력의 시대였다.
소박·소탈한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도 왜곡·과장됐다는 평가다. 많은 이들이 농민들과 둘러앉아 소탈하게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으로 박정희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인들과 어울려 자주 연회를 즐겼던 대통령이었다. 연산군 시절 젊은 여인들을 궁으로 데려오는 조직이었던 '채홍사'(採紅使)는 박정희 시대에도 존재했다.
박정희가 친일파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해서 좌익활동을 했으며, 그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 역시 베일에 가려졌다. 이 모두는 우리가 알고 있던 박정희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공적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말살했던 독재자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둘 모두 박정희의 본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던 권력자의 브레이크 없는 폭주와 부끄러운 치부는 철저하게 가린 채 공만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황 대표 역시 이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박정희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발언이 나온 배경일 터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의 한쪽 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객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더욱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무자비한 폭력에 피해를 당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비인도적인 발언이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 없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이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과거사 인식 행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은 지금도 과거사를 끊임없이 왜곡·미화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반인륜적 범죄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는 이유일 것이다.
황 대표의 인식은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와 크게 차이가 없을 뿐더러, '5·16 혁명'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현행 헌법과도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역사는 물론 헌법까지 부정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 대표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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