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항상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여러 차례 위기에 빠진 당을 이끌며 선거를 견인했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과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디도스 공격 의혹 등의 위기 상황에서 열린 2012년 18대 총선입니다.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대표였던 박 전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공원에 천막당사를 설치하며 총선을 이끌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후폭풍과 차떼기당의 오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간절한 읍소가 통했던 걸까요. 한나라당은 참패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121석을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18대 총선 당시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정운영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습니다. 무상급식 논란 속에 치러진 서울시장 보선에서 패배했고,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의 여파로 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된 박 전 대통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는 등 혁신 작업에 앞장섰습니다.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며 강도 높은 정치 쇄신을 약속했습니다..작전은 이번에도 주효했습니다.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과반을 넘긴 153석을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의 승리, 한나라당 공천 배제 이후 친박계가 결성한 미래희망연대가 2008년 총선에서 지역구 6명, 비례대표 8명 등 모두 14명을 당선시킨 것도 박 전 대통령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게 만듭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달리 붙은 것이 아닌 것이죠.
21대 총선을 40여일 앞둔 시기, 박 전 대통령이 몰고온 '바람'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보수의 텃밭인 대구·경북지역은 물론 보수진영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메시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4일 공개된 '옥중서신'이 '총선 개입' 논란으로 비화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더욱이 박 전 대통령의 서신 행간 곳곳에는 보수진영에 보내는 깨알 같은 '지침'과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선거의 여왕이 귀환한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서신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수통합을 주문한 대목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서신에서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고 강조했습니다. '거대 야당'인 통합당을 중심으로 모든 보수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현재 보수진영은 절반만 통합된 상태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 등이 규합해 통합당을 출범시켰지만, 자유공화당, 친박신당 등 이른바 '태극기 세력'과는 통합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은 보수야당을 향해 단일대오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통합당을 중심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강력한 지침인 셈입니다.
총선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진영이 분열되고 선택지가 나뉘어질수록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처럼 보수 후보가 난립한다면 자유공화당과 친박신당 등으로 분산되는 1~2%의 보수표 때문에 통합당 후보가 낙선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이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옥중서신이 참 대단하기는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가 공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공화당과 태극기세력이 즉각 화답한 것입니다. 자유공화당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큰 결단으로 크게 환영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태극기 우파세력과 미래통합당 등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보수 집회를 주도해온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와 자유대한호국단, 자유연대 등 보수 단체 역시 이날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분열 양상을 보이던 보수진영이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으로 일순간에 교통정리가 돼버리는 모양새입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통합'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분들이 무능하고 위선적이며 독선적인 현 집권세력으로 인해 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를 했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나라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 염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현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통합당 등 보수야당이 주장하는 '정권심판' 프레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보수통합을 견인하고, 정권심판 의지를 드러내 통합당에 힘을 실어주는 등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거를 눈앞에 두고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는 방식 역시 '선거의 여왕' 답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이 현실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각계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도로 친박당', '도로 새누리당'이라는 지적과 함께 통합당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쓴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진보진영의 결집과 중도·무당층의 반 통합당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됩니다. 박 전 대통령이 현실 정치에 개입하면서 '문재인-박근혜' 구도가 만들어질 여지가 생겼습니다. 이는 국정농단 사건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통합당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분석입니다.
박 전 대통령에게 투표권이 없다는 점도 논란거리입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되지 않으면 선거권이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0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공천에 개입한 혐의로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1월 징역 2년의 형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선거운동을 할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이와 관련 선관위는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되는지의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 선관위가 박 전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다면 이 역시 부정적 여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정농단 사건 등으로 탄핵돼 구속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이 또다시 현행법을 위반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든 셈이기 때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에 통합당은 "이 나라, 이 국민을 지켜달라는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이 우리의 가슴을 깊이 울린다"(황교안 통합당 대표), "박 전 대통령께서 감옥에서 의로운 결정을 내려주셨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김형오 통합당 공천위원장)라고 반응하는 등 크게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이는 자유공화당, 친박신당 등을 비롯한 보수진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실제 보수진영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주지한 바와 같이 진보진영의 결집이 예상되는 데다, 태극기 세력이 합류할 경우 오히려 중도세력이 이탈하는 등 위험요소가 늘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장 비례정당 문제로 이견을 보이던 더불어민주당과 민생당, 정의당 등 범여권이 박 전 대통령과 통합당을 향해 역공에 나서고 있습니다. 국정농단과 탄핵 사태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박 전 대통령이 반성과 참회 없이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통합당을 위시한 보수진영은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가 총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옥중서신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사면에 반대하는 여론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의 정치개입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박근혜의 귀환'이 상승세를 타고 있던 보수진영에게는 되레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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