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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뜬금 없는 황교안 담화문, 정치 도의도 메시지도 없었다

ⓒ 연합뉴스

 

어디일까.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 앞서 제1야당 대표가 내놓은 담화문의 내용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했던 건 사실 장소였다. 정치는 '메시지'가 아닌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선택은 국회 로텐더홀이었다.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서있는 곳이다.

황 대표가 광복절에 앞서 담화문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 안팎은 크게 술렁거렸다. 제1야당 대표의 광복절 담화문 발표부터가 이례적 일인 데다가, 대통령보다 앞서 발표하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이같은 세간의 시선에도 황 대표가 대통령보다 먼저 담화문을 발표한 이유는 제1야당 대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당 지지율 하락으로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치적 의제를 선점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런데 담화문을 발표한 장소가 이승만 동상 앞이다. 이승만은 보수진영 내부에서 '건국의 아버지', '국부' 등으로 한껏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선각자이자,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건국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담화문 발표 장소로 황 대표가 이곳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찾아온 혼돈의 시기 좌우로 흔들리던 국가를 지탱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한 이승만처럼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일 터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과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운 인물이다. 그중 독재 야욕을 드러낸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는 헌법가치와 민주주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반민주적 폭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54년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없애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해 장기독재의 서막을 열었다. 개헌안이 국회 통과 정족수에 미치지 못하자 소수점 이하를 버리는 꼼수로 법안을 통과시켜 버린 것이다.

사사오입 개헌은 훗날 3·15 부정선거로 이어진다. 부정이란 부정이 총동원된 3·15 부정선거는 아직도 회자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흑역사다. 위정자의 그릇된 정권 연장 야욕이 빚어낸 정치적 참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실제 1960년 이승만 정권은 투표함 바꿔치기, 1인 중복 투표, 선거인명부 조작, 투표시간 조작, 다수 공개투표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그 이후의 과정은 모두가 다 안다. 3·15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졌고, 이승만은 역사적인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쫒겨났다.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승만은 이밖에도 친일청산 방해, 보도연맹 학살사건,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당시 인도교 폭파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상흔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일각에선 독립운동 활동이 부풀려졌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흥미로운 것은 황 대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이승만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황 대표가 법무부 장관·국무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정권 내부에서는 국정농단이 무르익고 있었고,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최순실'과 공유하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황 대표의 책임이 적지 않은 이유다. 국정농단 사실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 있었다면 직무를 유기한 셈이다. 그러나 황 대표는 지금껏 자신의 과오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황 대표는 지난 1월 15일 한국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국정농단의 공범이라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정부에서 마지막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국가적 시련으로 국민들이 심려를 갖게 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을 뿐이다.

두루뭉술하고 모호하며, 무책임하다. 그 모습은 지금껏 달라지지 않고 있다. 황 대표는 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즉답을 피하거나, 선문답을 하거나 원론적으로 말을 한다. 의원들이 잇따라 막말을 내뱉어도 "그 말 그대로 이해해달라"는 식이다. 곤란한 상황을 용케 비켜가지만 명쾌하지가 않다.

 

ⓒ 경향신문



갑론을박이 뜨거운 이날의 담화문도 그 연장선상이다. 특별한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그간 황 대표가 보여온 방식의 재판이다. 대안과 비전을 찾아보기 힘든 '기승전-문재인 정부 비판'이 거의 전부다. 경제는 사면초가, 민생은 첩첩산중, 안보는 고립무원. 황 대표가 하려는 말들은 이 세 구절에 모두 압축돼 있다. 그러나 날선 비판과 달리 위기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담론은 역시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잘사는 나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 미래를 준비하는 나라, 화합과 통합의 나라, 한반도 평화 시대'라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여전히 불명확하다.

정치 도의나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엄중한 시국과 국민정서를 고려해 최소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비판과 대응책 등은 제시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이번 일본과의 분쟁을 감정이 아닌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주길 바란다"는 주문이 전부였다.

사정이 이러니 "저분이 항상 얘기하는 것은 삼라만상, 모두를 다 열거하더라. 명확하게 짚어서 '이게 잘못됐는데,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모든 걸 다 잘못됐다고 하니까 (담화문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박지원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 의원, YTN 노종면의 더뉴스와의 인터뷰)는 혹평까지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황 대표 취임 이후 한국당은 점점 극우보수적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퇴행적 인식과 시대착오적인 행태로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층의 마음을 껴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황 대표 체제 이후 한국당 내에서 국민적 공분을 받는 망언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여당과는 물과 기름이다. 황 대표는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제 시행, 추경안 처리, 남북 관계, 중국·러시아 군용기 영공 침해, 북한 목선 사태, 한·미동맹, 일본 경제보복 등 경제·외교·안보 현안과 관련해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러나 그뿐이다. 내용과 컨텐츠 없이 정부 비판에 몰입할 뿐, 대안세력으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 지지율 하락은 필연이다. 세간에선 '도로 친박당'이라는 냉소가 터져나오기도 한다. 취임 6개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일까.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야당 대표의 뜬금 없는 광복절 담화문에 논쟁이 뜨겁다. 시기와 내용, 장소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평가는 썩 좋지 않은 듯하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한국당이 제1야당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탓일 테다. 

건설적인 비판과 현실적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반대와 보이콧, 비토와 몽니를 부리고 있으니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기성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황교안'의 약점도 도드라진다. 더욱이 그에게는 국정농단의 그림자와 겹치는 태생적 한계마저 있다. 

"과거에 머무를 건가. 미래로 함께 나아갈 건가"

황 대표가 이날 던진 화두다. 그러나 이 질문이 어디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문제일까. 남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길 권한다. 담화문 제목처럼, 오늘을 이기고 내일로 나아가려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할 터다. 미래를 말하면서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황 대표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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