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이 30년 이상 건국사를 칼질하니 그 결과 주사파가 나타났고, 문재인이라는 하나의 정치적인 괴물을 만들어냈다"
13일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실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제자리를 찾자!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이주천 전 원광대 교수는 한국당 등 보수야당 일각에서 제기돼온 '1948년 건국'을 강조하면서 광복절의 의미를 깎아내려 눈길을 끌었다.
그는 "1948년에 우리 손으로 건국한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며 "건국 100주년은 역사적인 사기다. 대통령이 역사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익과의 전쟁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
발제를 맡은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역시 "우리는 1945년에 주권을 찾지 못했고, 주권 회복은 1948년 8월15일에 했다"라며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은 광복이 아니라 해방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8·15 해방인데 광복이라고 써놨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또 "문재인 정부가 2017년 광복절 행사를 한 내용을 보면 8·15 해방에 맞춰져 있고 정부 수립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특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인정하고 건국은 부정한다. 정부 수립과 건국은 다르다고 하는 게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각을 세웠다.
지난 2017년 72주년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2019년을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으로 못박아 '1948년 건국' 주장을 일축한 바 있는 문 대통령을 작심 비판한 것이다.
두 사람의 발언에서 이날 토론회의 취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극일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한편 보수진영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온 '1948년 건국'에 불씨를 지펴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토론회를 주최한 이 의원의 환영사에서도 이같은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환영사에서 "광복절의 숭고한 의미는 최근에 좀 이상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라며 "자칫 친일청산, 과거사청산에만 매진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사로 전락될 수 있는 위기에 있는 듯 하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이번 74주년 광복절은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에 반일 감정이 솟구치고 있는 가운데 열린다. 한국당으로서는 이같은 국민적 공분의 불똥이 '친일 프레임'에 빠져있는 자신들에게 옮겨붙는 것이 달갑지 않은 입장이다.
'건국절'이 사회적 논란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건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을 '건국 60주년'으로 부르면서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광복 71주년, 건국 68주년"을 언급하며 '1948년 건국' 논란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한국당을 필두로 보수진영 일부가 주장하고 있는 '1948년 건국'은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다. 무엇보다 이 주장은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현행 헌법 전문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유지·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당 등이 '국부'라 추앙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인정했던 부분이다. 이승만 정부가 48년 9월 1일 제헌헌법 전문이 실린 관보 1호를 발행하면서 연호를 '대한민국 원년 9월 1일'이 아닌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기록한 것이 그 결정적 증거다.
건국론자들은 주권·영토 등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라고 명시된 제헌헌법과 충돌한다.
'1948년 건국' 주장은 헌법 제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와도 배치된다. 현행 헌법은 북한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를 포함해 한반도 전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건국절을 인정할 경우 우리나라 영토는 반토막이 날 뿐 아니라 분단이 고착화돼 평화적 통일이 요원해질 수 있다.
한편으로 건국절은 1905년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세력이 반색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건국절을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탄생한 신생독립국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합법적 근거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건국절은 헌법을 부정하는 '반헌법'적, '반역사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돼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여론 역시 임시정부수립일인 1919년 4월 13일을 건국일로 생각한다는 의견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당 등 보수진영이 끊임없이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친일에 가담했다가 해방 이후 건국 주도 세력이 된 친일파들을 '건국 공로자'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018년 8월 13일 심재철 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건국 70주년 기념 토론회'에 참석한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건국론자들이) 건국일을 강조하는 배경엔 결국 건국공로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있다고 본다"라며 "(이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 이슈를 꺼낸 것이라 본다"고 주장했다. 건국절 인정이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역시 2008년 <프레시안>에 기고한 <건국절? 차라리 8·29를 '문명절'이라 해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 민족 대다수에게 건국과 광복은 대립되는 개념일 수가 없지만, 몇몇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생물학적 또는 정치적 후예들에게는 해방이나 광복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건국절 주장의 배경에 '친일파'가 있다는 해석이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도 2018년 8월 15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3·1민족독립항쟁은 전세계의 조선 민중들이 모두 참석해 임시정부를 만든 것이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들로, 이들은 친일파의 역사를 없애기 위해 1948년이라고 하는 것"이라며 "나라는 이미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지 건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건국과 정부수립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로 역사학자들과 학계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국절 논란이 한창이던 2016년 8월 22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20개 단체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계 원로 20명은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세탁'이 바로 건국절 주장의 본질"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건국절 주장의 속내에 임시정부의 법통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둔갑시키려는 저의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친일파의 후손들이며, 그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독재를 미화하는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지적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토론회를 주최한 당사자가 이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규정해 엄청난 사회적 파문에 휩싸였던 장본인이다. 한국당 윤리위의 제명' 결정에도 여전히 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그가 이번 토론회를 주최한 것을 과연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한국당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관련 의원들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중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이 정치공방으로 비화된 데 이어, 일본과의 외교 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아베 편들기에 나서 빈축을 사고 있다.
이번 토론회 역시 같은 맥락일 터다. 좋은 얘기도 시기와 장소를 가려 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그러나 한국당에게는 이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듯 보인다. 친일 프레임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면서도 반헌법적·반역사적이라 비판받는 '1948년 건국' 주장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들은 '친일 논란'에서 벗어날 마음이 영 없는 모양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시국에 터져나오고 있는 한국당의 '비상식적'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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