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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권의 나팔수? KBS를 망가뜨린 게 누군데 이제 와서..

ⓒ 오마이뉴스

 

"KBS가 정권의 나팔수가 됐다. 이런 KBS가 시청료를 받을 자격이 있나. 공영방송 장악하고 정권 홍보방송 만든 이 정부를 우리 손으로 심판해야 하지 않나."

25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수신료 거부를 위한 전국민 서명운동 출정식'에 참석했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발언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주 낯익은 구호가 황 대표의 입을 통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나팔수'.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던 시절, 그런 언론을 비판하며 회자되던 말이 바로 '정권의 나팔수'였다. 그런데 이 표현이 정권이 바뀐지 2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한국당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이날 열린 수신료 거부 출정식은 KBS와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행사에는 황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해 김규환·김성태·박대출·박맹우·여상규·이양수·전희경·정진석·조경태·추경호·최연혜 의원 등이 참석해 독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황 대표는 "KBS가 국민을 배신했다. 정권의 나팔수가 됐다. 언론의 길을 포기했다"며 "권력과 자본에서 자유로워야 공정한 방송인데 친북 좌파 세력들이 KBS를 점령했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어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핍박하고 내쫓고, 그 자리를 좌파 친문 세력들이 꿰찼다"며 "민노총 노조원들이 합세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KBS를 주무르는데 그냥 놔둬도 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원내대표도 "안보가 이렇게 위험하고 파탄이 나도 국민들이 잘 모른다. 공영방송 KBS가 편파방송을 하기 때문이다"라며 "정부의 신(新)독재 3단계가 방송 장악이다. 우리가 저지해야 한다"고 거세게 성토했다.

나 원내대표는 또 '청와대 외압설'이 불거진 KBS 1TV 시사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과 관련해 "KBS에 전화 한 마디 해서 '형님, 잘 봐달라'고 사정했던 이정현 홍보수석은 그 일로 집행유예형을 받았다"며 "그런데 재방송도 못하게 한 청와대 홍보수석, 즉각 수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KBS 장악 의도 즉각 수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국당 언론장악 저지 및 KBS 수신료 분리징수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대출 의원 역시 "최근 총선 개입 보도라는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다. 9시 뉴스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하면서 한국당 로고를 끼워넣은 동영상, 한국당을 안 뽑는다는 내용이 보도됐다"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는다. 이게 정상화된 공영방송이냐"고 힘을 보탰다.

한국당이 단단히 뿔이 난 계기는 지난 18일 KBS <뉴스9>이 보도한 '일 제품 목록 공유... 대체품 정보 제공까지'라는 제목의 리포트다. <뉴스9>은 일본제품 불매운동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불매 목록을 공유하는 '노노재팬'의 '안 뽑아요' 로고를 송출하며 한국당 로고가 박힌 영상을 노출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KBS는 방송 하루 만인 19일 "어제 9시 뉴스에서 다룬 일본 제품 불매운동 관련 리포트에서 특정 정당의 로고가 노출됐다"며 "해당 동영상파일에 포함됐던 특정 정당의 로고를 사전에 걸러내지 못한 점을 사과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한국당은 KBS가 내년 총선에 개입하고 있다며 이날 KBS를 상대로 25억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방송장악을 규탄하는 시위는 물론 지난 연말부터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수신료거부 운동에 적극 동참해 KBS 압박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데자뷰다. 이날 등장한 '조작방송, 편파방송, 불법방송 KBS 해체하라', 'KBS 수신료 거부한다', 공영방송 장악', '정권 홍보방송, '총선개입·편파방송' 등의 구호는 불과 몇 년 전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이 한국당(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을 비판하며 했던 말과 아주 흡사하다.

 

ⓒ 오마이뉴스



"정권의 나팔수화 하는 KBS는 더 이상 공영방송이라 할 수 없음으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수신료 거부 운동'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9년 1월 18일 민주당이 낸 성명서 내용 중 일부다. 당시 민주당은 이병순 KBS 사장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기자와 PD 등을 전격 해고시키자 긴급 성명서를 발표하며 KBS를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민주당은 성명서에서 "이명박 정권은 KBS공영방송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기 위해 감사원의 KBS 특별감사, 국세청의 외주 제작사 특별 세무조사, 경찰의 KBS내 불법난입, 정연주 사장에 대한 검찰의 긴급체포 등 모든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했다"며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 최시중씨를 방송장악의 총감독격인 방통위원장으로 투입하여 김금수 KBS이사장을 내쫓고, 지난 16일 법원 판결을 통해 그 부당함이 밝혀진 동의대 신태섭 교수의 KBS 이사직 강제박탈도 자행했다"고 꼬집었다.

또 "2008년 8월11일, 최시중 방통위 위원장과 이동관 대변인, 나경원 한나라당 제6정조위원장, 그리고 김회선 국정원 2차장이 정연주 사장 해임 이후를 위한 사전 대책회의를 추정케하는 비밀회동이 있었음이 밝혀졌다"며 "5공 시절 언론장악을 위한 안기부의 비밀공작을 연상케 하는, 소름끼치는 무서운 음모가 2008년도 이명박 정권 때에 재현됐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성명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언론환경을 보여주는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날 출정식에서 터져나왔던 '조작방송', '편파방송', '불법방송', '정권 홍보방송', '총선개입방송' 등은 기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당의 전신이던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즐겨듣던 비판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언론 환경이 어땠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명박 정부는 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해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의 족벌언론이 10%의 지분 한도내에서 지상파TV를 경영·소유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 각계각층이 우려했던 것처럼 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 공공성이 위축되고 이념적 편향성이 도드라지는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력의 검은 치부를 감시·비판하는 시사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정부 비판적인 언론인이 무더기 해고당하는가 하면, 진보성향의 폴리테이너들이 방송에서 퇴출됐다.

공정성과 독립성을 최우선해야 하는 방통위원장을 비롯해 방송사와 언론계 곳곳에  대통령 측근이 낙하산으로 내려보내졌고, 정부·여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내용에 외압을 행사하거나 노골적인 정권 편향적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논란이 됐던 세월호 참사 보도 외압과 2012년 대선 당시 KBS의 편파 방송이 그 비근한 예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은 재임시절 세월호 참사를 포함해 청와대로부터 수시로 외압과 사내 인사에 대한 개입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와 보도 관련 요구를 하고, 길환영 사장이 특정뉴스를 빼거나 축소하라는 지시를 수도 없이 했다는 내용이다.

한국당은 로고 송출을 총선개입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2012년 대선 정국에서 KBS는 노골적으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유리한 편파방송을 내보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선 국면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11일 언론노조 KBS본부는 공정방송추진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KBS 대선보도가 "뉴스 제작과 편집 모두 일관되게 불공정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공추위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된 7월 26일부터 10월 4일까지 지상파 3사의 메인뉴스를 모니터링한 결과다.

KBS방송문화연구소가 KBS옴부즈맨으로 활동한 교수진에게 의뢰해 18대 KBS 대통령 선거보도의 공정성 연구를 진행한 결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연구진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선거 이전 100일 간의 KBS <뉴스9> 대선보도 364건의 뉴스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KBS가 박근혜 후보에게 우호적인 보도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당시 KBS <뉴스9>의 진행자는 현 한국당 대변인인 민경욱 의원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자행된 언론·방송 장악 사례는 이밖에도 부지기수다. 정권 내내 왜곡·편파·불공정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들에게 해고와 징계, 불이익이 내려졌다.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 회복을 위한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 역시 한국당이 집권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한국당의 주장이 자가당착이며 적반하장, 어불성설인 이유다.

황 대표는 최근 김재철 전 MBC 사장을 언론 특별보좌역에 지명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 전 사장은 공영방송 MBC를 망가트린 주역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MBC는 '정권의 혓바닥'이라는 조롱까지 받을만큼 철저히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런데 '공영방송 죽이기'에 앞장섰던 김 전 사장이 KBS를 '정권의 나팔수'라 비난하는 황 대표의 언론 특보로 발탁됐다.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KBS 보도와 관련해 '조작·편파·불법·불공정·총선개입' 등등의 말들이 한국당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격정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 모습에서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씁쓸한 아이러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의 방송의 독립성·중립성 훼손 논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국당이 돌연 공정방송 회복을 외치고 있으니 어찌 아니 그럴까. 

기사를 쓰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뻔뻔해도 되는 것인가. 도대체 국민을 뭘로 보고. 어쩌면 사람들은 한국당의 모습 속에서 오래된 영화 제목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아니 정권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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