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시지탄(晩時之歎). 때늦은 탄식이라는 뜻으로, 이미 늦었거나 기회를 놓쳤다는 말입니다. 장고 끝에 7일 '정치 1번지' 종로 출마를 선언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처지를 비유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요.
수도권 험지 출마 뜻을 밝힌 이후 황 대표는 한 달이 넘게 출마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정치권을 비롯해 대다수 언론이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의 종로 맞대결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황 대표의 선택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더욱이 종로는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부입니다. 세 명의 대통령(윤보선·노무현·이명박)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고, 선거 때마다 중량감있는 여야 간판 정치인들의 빅매치가 자주 열리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언론은 두 사람의 맞대결을 예측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정치권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종로지역 현역인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자 이 전 총리를 전략공천할 뜻을 내비쳤습니다. 지난달 23일 이 전 총리 역시 "엄숙하게 받아들인다"며 수락 의사를 밝혔습니다.
한국당도 황 전 총리의 종로 출마에 무게를 두고 판을 짰습니다. 다른 지역에 출마할 경우 이 전 총리와의 맞대결을 피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는 데다, 중진들의 험지 출마를 요구해온 황 대표의 입장과도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미 세간에는 이 전 총리와 황 대표가 종로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습니다. 여야의 차기 대선주자 1순위로 거론되는 '이낙연-황교안' 두 전직 총리의 맞대결 구도가, 두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만들어진 것이죠.
황 대표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입장이 돼버렸습니다. 시쳇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미 험지 출마 의사를 밝힌 이상 황 대표가 이 전 총리와의 맞대결을 피해갈 경우 '겁쟁이' 프레임에 말려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선주자로서의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가 생기는 셈입니다.
총선을 진두지휘 해야 할 당 대표로서의 리더십 역시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미 중진들의 험지 출마 요구와 TK 지역의 공천배제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황 대표를 향한 당내 불만이 가중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 대표가 다른 지역을 선택할 경우 공천 과정에서 거센 후폭풍이 불가피해집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출마 선언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종로 출마를 저울질 할수록 황 대표를 향한 당 안팎의 불신와 의혹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당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종로에 출마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린 이상 정면돌파하는 편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출마를 고심했던 황 대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낙연-황교안' 전직 두 총리의 맞대결은 차기 대선의 향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전초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단순히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차기 대권, 나아가 황 대표의 정치생명과 직결돼있는 인생 일대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입니다.
만약 황 대표가 패배하게 될 경우 대권가도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되는 것은 물론 당내 입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당의 총선 결과에 따라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치명상을 입게 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선거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SBS의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지난달 28~30일까지 사흘간 종로구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2일 발표한 종로구 가상대결 결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 응답률은 17.1%)에 따르면, 이 전 총리는 53.2%의 지지율을 기록해 황 대표(26.0%)를 두 배 이상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성인 2511명을 대상으로 조사(응답율 4.9%.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0%p)해 4일 발표한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결과에서도 이 전 총리는 29.9%를 기록해 황 대표(17.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
황 대표가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던 실질적인 배경일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무려 한 달이 넘게 출마를 저울질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죠. 단 한 번의 결투로 자칫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날 오후 3시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서 열린 출마기자회견에서 "종로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는 상대방은 문재인 정권이다. 일대일의 경쟁이 아니고 문재인 정권과 저 황교안의 싸움"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정권심판 프레임으로 선거구도를 짜는 편이 선거 결과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출마 시기입니다. 선거 흐름상 이 전 총리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출마 선언을 하는 편이 현명했습니다. 어차피 칼을 빼야 한다면 선거 전략적 측면에서나, 내부 결속을 위해서나 그 쪽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 대표는 그 타이밍을 실기한 느낌입니다. 이 전 총리보다 먼저 출마 선언을 하고 링 위에서 당당히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대내외적 위상이 지금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황 대표는 좀처럼 결심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좌고우면하듯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그 사이 당 내부에서는 중진들과 TK 지역 의원들의 불만과 볼멘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공천관리위원회와의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로부터는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해 달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슈를 선점해 출마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할 시기에 외려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는 비판을 자초한 셈입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련하게 부산 출마를 고집해 세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편한 길을 버리고 정치적 결단을 감행한 것이죠. 결국 그 진심은 통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었지만, 그 패배는 훗날 그를 일으켜 세우는 밑거름이 됩니다.
황 대표의 경우는 어떨까요. 황 대표는 이날 출사표를 통해 "정권심판의 최선봉에 서겠다. 문재인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민심을 종로에서 시작해 서울 수도권,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정면승부를 펼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군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출마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등 떠밀려서 마지못해 나간다는 인상을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대하던 종로 '빅매치'가 성사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뒷맛은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만시지탄' 고사가 머리 속을 맴도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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