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늘 이종걸 원내대표를 마지막으로 필리버스터를 끝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어제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중단과 관련한 당내 의견 조율에 진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밤 늦게까지 계속된 의총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고 결국 김종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와 정청래 의원의 심야 회동을 거친 이후에야 중단을 공식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 노컷뉴스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향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성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필리버스터가 이렇게까지 뜨거운 호응을 받게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치 볼모지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혁명에 가슴 벅찬 희열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감동이 야당의원들을 향한 뜨거운 격려와 지지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국회는 필리버스터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방청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국회방송과 인터넷 방송을 밤잠 설쳐가며 시청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국회방송의 시청률은 이전보다 20배 이상 상승했고,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하는 팩트TV의 경우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의 접속자 수가 무려 180만명을 넘은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온라인 포털사이트와 커뮤니티 게시판, SNS에서는 연일 필리버스터가 화제가 되었고 급기야 '마국텔'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필리버스터는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만들어 내며 지난 일주일 동안 대한민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 뉴스1
시민들은
왜 필리버스터에 열광했던 것일까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필리버스터는 기존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정부여당의 일방적 의사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낯뜨거운 욕설과 고성, 몸싸움이 오갔던 국회 본회의 풍경에 익숙해져 있던
시민들에게 이 모습은 대단히 신선했습니다. 정치선진국에서나 볼 수 있었는 장면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정치다운 정치를 보게 됐다며 필리버스터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필리버스터가 저급했던 대한민국 정치문화를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필리버스터에 뜨겁게 호응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을 강행하려는 청와대와 여당에 맞서 열변을 토해냈던 야당 의원들의 진심어린 모습이 시민들의 감동을
이끌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리버스터로는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토론에 임했습니다. 그 모습이 TV와 모니터를 통해 생생하게 시민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이명박 정권 이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에 고무되었습니다.
시민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야당의 모습을 마침내 보게된 것입니다.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는 야당 의원들의 분투는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아가 야당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우리 정치의 불합리와 모순을 무너뜨리는 한편 야당의 지독한 패배주의를 덜어낼 수 있는 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던 필리버스터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순간에 더불어민주당은 또 다시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던 이 정당의 한계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해 보입니다.
ⓒ 노컷뉴스
선거구
획정이라는 거대한 암초 앞에 필리버스터 정국의 출구전략을 짜야 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출구전략은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출구를 열기는 열었는데 그 출구 앞이 벼랑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어제 시민사회는 하루 종일 들끓었습니다. 필리버스터에 열광했던 시민들은 이제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 중단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역풍이 두려워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려는 그들이 오히려 역풍에 휩싸인
모양새입니다. 필리버스터를 지켜보았던 시민들의 열망을 그들이 끌어안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는 분명한 전략적 실패이자 더불어민주당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아무리
냉철하게 살펴봐도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얻게 될 실익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김종인 체제의 비대위가 내세운 경제민주화로의 프레임 전환이 총선 승리를
위한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며 그렇게 될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언론을 완벽하게 틀어 쥔 새누리당은 프레임 싸움에
휘둘릴 상대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프레임 싸움으로 가게 되면 야권의 필패는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은 모든 면에서 야권에게 불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권이 새누리당에 맞서려면 필리버스터 정국에 나타났던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선거 국면까지 이어가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 민중의소리
그러나
김종인 비대위는 야권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포기한 채 거대 여당을 상대하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시민들의 실망과 탄식, 분노를 과연 저들의 호기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선거 혁명을 통한 기적을 꿈꾸었던 수많은 시민들의
염원과 바람이 한 줌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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