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암살'(2015)에는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낯선 인물이 등장한다. 극중 백범 김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조국의 현실을 비탄하던 남자,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고 그래서 가장 잡고 싶어했던 남자, 약산(若山) 김원봉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열단을 이끌었던 약산은 일제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만 무려 100만원에 달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은 족히 되는 돈이다. 김구의 현상금이 60만원이었다 하니 새삼 약산의 위상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약산은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공로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독립투사이자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는 김구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걸릴 만큼 눈부시게 활약했던 것을 감안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약산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0일 국회회관에서 열린 '사회주의자 서훈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어쩌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진태·정태옥·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동주최한 이날 토론회에는 같은 당 김순례·심재철·안상수·송언석·정우택 의원, 김준교 전 청년최고위원 후보 등이 참석해 손혜원 의원 부친 손용우 선생의 독립유공자 지정 특혜 의혹과 약산의 서훈 추진 움직임을 맹렬히 성토했다.
김진태 의원은 "손혜원 의원 부친은 국가 유공자 선정 특혜를 넘어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다"며 "자료를 같이 보고 간첩 혐의자가 맞는지 판단해야 하는데, 자료를 보훈처에서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약산에 대해서도 "김원봉 서훈은 김일성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어디 가서 영화를 보고 한마디 했다 하니까 전광석화처럼 움직이고 있다. 간첩 혐의자에 대해서 유공자로 인정하고 남침의 주범까지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할 것 같으면 대한민국은 문을 닫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토론회를 공동주최한 정태옥 의원 역시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 논란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려는 여러 시도"라고 강력 비판했다.
정 의원은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인물들, 대한민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남침하려는 사람들을 서훈하려 한다"며 "대한민국 건국에서 어떻게 해서든 이승만과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빼려는 집요한 시도는 결국 북한하고 친하다는 것을 듣기 위한 것"이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안상수 의원도 거들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붕괴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한테, 우리의 적 성격인 사람들한테 훈장을 주는 것이 맞냐"라며 "이 사람들을 북한에 데려가서 서훈을 주게 하면 될 것이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정우택 의원도 "서훈 기준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정권 지향적인 모습을 보이는 보훈처에 지탄을 금할 수 없다"라며 "보훈처가 제대로 가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순국선열들도 울분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분개해 했다.
한국당은 약산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한 이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요직을 지내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에 서훈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공산주의자에게 훈장을 줄 수 없다는 논리다.
한국당의 주장처럼, 약산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던 것일까. 역사학자인 전우용 교수는 지난달 27일 페이스북에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저승의 김원봉 본인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라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노덕술의 후예인 친일파 토왜(토착왜구)들이 활개를 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전 교수의 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의열단을 조직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을 지낸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이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해방 이후 남한의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전 교수는 "일제가 그토록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던 김원봉이었지만, 귀국 후 한국인 경찰에게 체포됐다"며 "그를 심문한 자는 친일 고문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이라고 지적했다.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몰린 약산이 악질적인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붙잡혀 구타와 고문을 당한 일화를 전한 전 교수는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고 돌아온 김원봉은 꼬박 사흘을 울었다"며 "그가 남북협상에 남측 대표로 참석한 후 북한에 눌러 앉은 건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해방 이후 친일잔재 청산에 앞장서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에 의해 기득권으로 편입된 친일부역세력에게 또다시 고초와 박해를 받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좌익, 빨갱이로 몰려 테러를 당했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 교수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한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한라산으로 올라가 무장대에 합세했던 4·3 사건을 예로 들며, "해방 이후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공산주의자들과 한편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들을 '공산주의자'에게로 밀어붙인 자들은 다름 아닌 친일파, 토왜들이었다"며 "자기들의 토왜짓을 은폐하기 위해, 또는 당장의 사익을 위해, 애먼 사람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그들로 하여금 죽거나 북한에 가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학계에서도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약산이 어쩔 수 없이 월북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한 사람의 족적을 두고 이렇듯 서로 다른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약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일 터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당의 정치적 뿌리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를 일삼았던 친일부역세력을 그대로 흡수해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친일청산을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가 와해된 것도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 때문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일제를 분노와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독립투사 약산은 강점기간 단 한 번도 붙잡힌 일이 없다. 그런 약산을 해방 이후 다시 경찰간부가 된 노덕술이 체포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악질적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은 이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하며 '화랑무공훈장'(1951, 1952), '충무무공훈장'(1953) 등 세 차례에 걸쳐 서훈까지 받았다.
반민족행위자인 노덕술이 받은 훈장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한국당이 약산을 "공산주의자", "빨갱이"라 규정하며 서훈 반대를 외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답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와있는지도 모른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해방 이후엔 남북 분단을 막기위해 분투했던 약산이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여야 5당 원내대표로 구성된 원내대표단은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그러나 약산은 여전히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약산의 생애는 개별 주체의 가치 판단에 따라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 약산의 월북과 북한에서의 행적 역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약산의 눈부신 업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다.
약산이 없는 항일운동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약산이 월북하게 된 경위나 일제강점기의 행적 등을 감안한 온전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는 나라, 민족반역자가 서훈을 받는 나라라면 제2의 '김구·안창호·윤봉길·유관순...', 그리고 '김원봉'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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