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위안부 피해자 문제, 여전히 일본 편드는 박근혜 정부

ⓒ 오마이뉴스


"우리 죽으면 우리 죽은 뒤, 나 죽은 뒤에는 말해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싶은 생각에 내가 이제 나이가 이만치나 먹고 제일 무서운 것은 일본 사람들이 사람 죽이는 거, 제일 그걸 내가 떨었거든. 언제나 하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끌려가서도 봤지만도 사람 죽이는 걸 너무 많이 봤고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는 사실 무서워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어)" - 고 김학순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1991년 8월14일 국내 거주자 중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공개 증언했던 고 김학순 할머니는 몇년이 지난 1997년 7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했던 끔찍한 참상을 생생히 증언했다. 김 할머니는 너무나 무서워서 젊었을 땐 도저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 인터뷰는 당시 폐질환을 앓고 있던 김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였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97년 12월, 김 할머니는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김 할머니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세상에 공개한지 25년이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양국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합의했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직접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직접 배상이 아닌 10억엔의 치유금(일본 측 주장 거출금)을 받는 조건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제안한 민간 기금 지원을 단호히 거절하며 진심어린 사죄와 정당한 배상을 요구했던 김 할머니의 생전 뜻과는 정반대되는 합의였다.

지난 28일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가 이루어진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사이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치유·화해 재단이 출범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치유금 10억엔이 출연됐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것 이외에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여전히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 정부는 합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과거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애시당초 '12·28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협의 없이 진행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직접적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배제된 합의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는 피해자들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을 제시하겠다고 강조해온 터였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정상회담도 없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뒤집고 작년 11월2일 아베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갖었고, 그로부터 불과 한 달여 만인 12월28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합의에 이른다.

국민 정서와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이 배제된 졸속 협상 타결에 비난이 폭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즉각 "피해자들과 국민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다수 국민 역시 정부가 합의를 무효화하고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날선 비난에도 정부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외교부가 지난 10월 25일 발간한 '2016년 외교백서'는 '12·28 합의'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외교부는 '12·28 합의'가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이 문제를 풀어 그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피해자들의 요구와 바람이 가능한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협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졸속·굴욕 협상에 대한 국민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 오마이뉴스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일본대사관 건너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올해의 마지막 정기수요집회가 열렸다. 이날의 집회는 다른 날보다 더 엄숙하고 무거운 가운데 열렸다. 올해 운명을 달리하신 할머니 7명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함께 진행된 탓이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29일 '12·28 합의'를 이끌어낸 당사자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정부 차원에서 24년간의 난제를 과거 어느 때보다 진일보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 이질적인 장면 속에 '12·28 합의'가 갖는 한계와 본질적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수요집회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윤 장관은 문제의 본질을 에둘러 비켜가기에 급급하고 있는 모습이다. 


윤 장관은 이날 "지금 반대하는 할머니들도 있지만 4분의 3 정도는 정부의 노력을 평가하고, 살아 생전에 이런 조치를 취해준 걸 고마워하는 분들도 더 많이 계시다는 걸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국민의 2/3가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은 안중에도 없다. 아찔한 것은 또 있다. 윤 장관의 발언에는 그동안 정부가 합의에 우호적인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피해자 사이를 분열시기며 합의의 성과를 포장해온 사실이 빠져 있다. 박근혜 정부의 전매특허인 '갈라치기' 전략이 재연된 상황이라면 윤 장관의 발언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독하는 기만행위나 다름 없다.


동안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 왔다고 강조해왔다.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문제였다. 겉으로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에 노력하고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베 총리는 '12·28 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위안부 강제연행에 증거가 없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10억엔을 지급했으니 소녀상을 이전하라고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숨기고 있던 발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행태 역시 일본 정부의 그것과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다. '12·28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라는 정부의 입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는 '12·28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자 사이를 분열시키는 이간책으로 여론을 호도해 나갔다. 위안부 기록물의 유니스코 등재사업 예산을 삭감했는가 하면, 위안부 백서 발간도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이 모습 그 어디에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1991년 8월14일 김 할머니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엄청난 비밀을 세상에 공개했다. 과거 자신들이 자행했던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파렴치한 행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김 할머니는 일본제국주의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야만의 실체를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사죄와 실질적인 태도 변화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어쨌든 끝나기 전에는 내가 안 죽는다. 110살까지도 살란다. 120살까지도 살란다. 지금 그러고 악을 쓰고 있잖아. 그냥 내 직접 내 눈으로, 내 귀로 (사과를) 들어야 하겠다고" - 고 김학순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


안타깝게도 김 할머니의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기 전에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겠다던 바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개한지 25년, 우리 곁을 떠난지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다. 아니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후퇴했는지도 모른다. 정부의 '12·28 합의'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국가는 김 할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로부터 백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국가는 여전히 김 할머니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 상처의 치유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외려 일본 정부에게 면죄부를 주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 할머니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보이는 정치·시사 블로그 ▶▶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