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 국회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로 도입됐던 '국회선진화법'으로도 '동물국회'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과 민낯이 여과없이 드러난 25일, 국회는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소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곳곳에서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의원이 동료 의원에 의해 감금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거제 개편·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법 등의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을 상정하려는 여야 4당과 이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내 바른정당계 의원들이 맞서면서 국회는 이날 하루종일 소동이 빚어졌다.
한국당이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상정을 육탄 방어하기 위해 전날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간 데 이어, 이날 바른미래당이 패스트트랙 의결을 위해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소속 오신환 의원을 채이배 의원으로 교체(사·보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당 지도부의 사·보임 신청서 제출을 막기 위해 이날 오전부터 국회 의안과에 집결해 방어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의 집단행동은 무위로 돌아갔다. 의안과 상황을 전해들은 당 지도부가 사·보임계를 인편이 아닌 팩스를 통해 제출한 것.
오 의원 사·보임계를 병가 중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결재하면서 국회 상황은 더 악화됐다. 소식을 접한 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성사의 열쇠를 쥔 채 의원 사무실 점거에 들어갔다. 여상규·이은재·민경욱 등 한국당 의원 10여 명은 사무실 입구를 소파와 집기 등으로 가로막고 채 의원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제지시켰다.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돼 있던 사개특위 회의에 채 의원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감금한 것이다. 결국 채 의원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과 국회 방호과 직원들의 도움으로 감금 6시간만인 오후 3시 15분께 가까스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난 1986년 이후 자취를 감춘 국회의장 경호권도 33년 만에 발동됐다. 공수처 법안과 검·경수사권 조정법안 제출을 위해 의안과를 찾은 사개특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을 한국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강력 저지하자 문 의장은 경호권을 발동시켰다.
국회법 제143조(의장의 경호권)에 따르면, 국회의장은 회기 중 국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국회 안에서 경호권을 행사할 수 있다. 문 의장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경호권을 발동했다는 것은 현 상황을 그만큼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경호권 발동에도 법안 제출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당이 겹겹이 스크럼을 짜고 육탄 저지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법안을 제출하려는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수차례 의안과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결국 민주당은 공수처 법안과 검경수사권 조정 법안을 '이메일'로 제출하는 방안을 택했다. 통상적 방법으로는 법안 제출이 어려워지자 이례적으로 이메일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 등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법안 발의 요건을 둘러싼 정치공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앞서 24일에는 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의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오 의원의 사·보임 허가 불가를 요청하는 한국당과 문 의장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30분 넘게 고성과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 의장은 사퇴하라"(한국당), "차라리 멱살을 잡으라"(문 의장)는 장면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됐다.
점입가경이다. 패스트트랙 상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총동원령을 내린 한국당은 국회 본회의실 앞과 의안과를 비롯해 사개특위·정개특위 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회의실까지 점거하고 패스트트랙 상정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로 인해 국회는 현재 전쟁터나 다름없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해머나 전기톱만 등장하지 않았을 뿐 막말과 고성, 몸싸움이 난무했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 모양새다.
국회를 '선진화'시키겠다고 만든 법이 바로 '국회선진화법'이다. 극한의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의 상생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바로 그 법 때문에 국회가 또 다시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여야 모두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물국회'에서 벗어나고자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됐지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말짱 도루묵이다.
현재 국회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그동안 지겹도록 목도해왔던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다. 당리당략에 따라 입장이 수시로 바뀌고, 내로남불이 횡행하고, 상대당의 발목잡기에 목을 매는 행태가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여당인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악순환이 계속되는 원인은 결국 시스템에 있다.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기득권 양당체제를 고착화시키는 제도, 정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제도 때문에 이 사달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사회적 폐해을 양산해온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승자독식의 현행 소선거구제는 유권자의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사표가 양산되기 때문에 민의가 왜곡되고, 그로 인해 대의민주주의의 순기능이 저해된다.
어디 이뿐인가. 대립과 반목, 맹목적 불신을 부추기는가 하면 지역주의를 야기시켜 국민을 분열시키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대다수 정치전문가를 비롯해 학계와 시민사회 등이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이유다.
심성정 정개특위위원장이 여야 4당이 합의안 선거제 개편안으로 시뮬레이션(20대 총선 개표 결과 기준)한 결과에 따르면, 국회 의석구도는 새누리당(110석)·민주당(107석)·국민의당(59석)·정의당(14석) 순으로 바뀌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대로라면 현재 의석보다 12석이 줄어드는 한국당이 16석이 줄어드는 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1당으로 등극한다. 반면 국민의당은 21석, 정의당은 8석이 늘어나는 것으로 집계됐다. 시뮬레이션 결과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쪽은 민주당이고, 반대로 이득을 가장 많이 보는 쪽은 국민의당이었다.
물론 시뮬레이션 결과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 이를 차기 총선에 그대로 대입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가 충실히 반영된 선거제도가 도입되면 정치환경이 개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현행 선거제도의 폐단을 상당부분 상쇄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정치는 생존을 위한 '정글'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의 룰'이 사라진 정치는 국민을 불행으로 이끌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정치 발전은 물론이고 국민의 삶 또한 개선되기 어렵다. 소선거구제에 노출돼 온 지난 수십년이, '동물국회'가 재연되고 있는 낡은 정치판이 그 방증이다.
바람 잘 날 없는 국회가 패스트트랙 상정을 둘러싸고 또 다시 난장판으로 변했다. 이 볼썽사나운 광경은 우리에게 선거제도가 개혁돼야 하는 이유를 되묻고 있다. 악순환의 사슬을 끊으려면 바꿔야 한다. 바꾸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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