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와 공수처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순간 20대 국회는 없다"고 예고했던 자유한국당이 공언한대로 칼을 빼들었다.
22일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 원내대표가 패스트트랙을 추진(선거제 개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23일 의원총회에서 이를 추인하자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한국당은 이날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을 추진하기로 최종 의결하자 이를 "좌파정변이자 좌파반란", "의회민주주의 붕괴", "친문(친문재인) 총선연대"라고 맹비난하며 총력투쟁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한국당은 그 일환으로 여야 4당이 합의한 패스트트랙 상정일인 25일까지 국회 로텐더홀에서 철야 농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오는 27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국회 보이콧을 비롯한 전면적인 강경 투쟁으로 여야 4당을 압박하는 한편 장외집회를 통해 대국민 여론전을 펼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국당의 입장은 한마디로, 여야 4당이 공조한 패스트트랙은 "입법쿠데타"이며 "좌파 장기집권 플랜"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자신들을 빼고 추진되는 입법 절차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배후에 장기집권을 노리는 좌파 정부가 있다는 주장이다.
위기의 순간, 한국당이 꺼내든 것은 역시나 '반정치주의'와 '색깔론'이다. 그러나 패스트트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회심의 카드가 이번에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8대 국회가 종료되기 직전인 지난 2012년 5월 '국회선진화법'이 전격 도입됐다. 당시 새누리당(현 한국당)이 주도한 이 법안은 몸싸움, 고성, 막말, 폭력, 날치기가 횡행하던 부끄러운 정치 행태에서 벗어나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었다. 몸싸움과 날치기 대신 대화와 타협을 통한 건설적인 정치문화를 조성하겠다는 취지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정치권이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한 실질적인 배경이다. 당시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부 심판론'으로 총선 패배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가동되던 시기였다.
과반 의석 달성이 불확실했던 새누리당은 19대 국회에서 야당이 될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 필요했다. 이는 선거 결과를 장담할 수 없던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국회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법안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진 이면에는 이처럼 선거 결과를 확신할 수 없던 당시 여야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국회선진화법 '제85조2'(안건의 신속처리)에 명시된 패스트트랙은 쟁점 법안에 대해 국회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서명 또는 해당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신속처리 대상 안건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야의 대립으로 쟁점 법안 처리가 안 될 경우, 다시 말해 특정 정당이 정치적 목적으로 법안 처리를 맹목적으로 반대하거나 지연시키는 경우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패스트트랙은 국회선진화법에 의거한 지극히 정상적인 입법 과정일 뿐 아니라 박근혜 비대위 시절 다른 누구도 아닌 새누리당이 주도했던 법안이다.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추진을 "의회쿠데타", "의회민주주의 붕괴"라고 맹폭하는 한국당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패스트트랙 추진이 "좌파 독재", "좌파장기집권 플랜"이라는 주장 역시 어불성설이다. 패스트트랙은 여야 4당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고육지책이다. 내년 4월 총선 일정 등을 감안하면 선거제 개편 시한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심 위원장이 정개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된 지난해 10월 이후 노골적인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지난해 12월 여야 5당 원내대표가 합의했던 선거법 개편안 1월 합의 약속을 파기하는가 하면, 지난 3월 17일 여야 4당이 선거제 개편 초안을 마련하자 뒤늦게 의원정수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폐지하는 위헌적 안을 제시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독재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의 손길을 거부한 것은 한국당 자신이다. 물리적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한국당은 잇따른 발목잡기로 선거제 개편에 마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추진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도입 등의 개혁입법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다는 사실도 한국당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28, 29일 이틀간 조사(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p)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6.3%가 국민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선거 제도 개혁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수처 도입 역시 마찬가지다.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의 의뢰로 지난 3월 26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한 결과, 공수처 설치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65.2%에 달했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도입 등 개혁입법이 절실한 이유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문제다. 극한의 대립과 지역주의, 기득권 패권정치를 부추기는 저급한 정치구조, 권력형 비리 수사에 취약한 현재의 사법시스템만 보더라도 이는 명확해진다. 다수 시민이 압도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것도, 여야 4당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겁박을 누가하는지 모르겠다"
지난 22일 국회 정상화를 위한 여야 5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으로 한국당을 겁박한다"는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의 모두 발언이 끝나자마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내뱉은 쓴소리다.
그 말 그대로다. 정상적인 입법절차인 패스트트랙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의회 쿠데타"가 아니다. 기득권 양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유권자의 표심이 제대로 반영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당제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좌파 독재'는 더더욱 아니다.
패스트트랙 총력 저지를 선언했지만 한국당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서늘하다. 정치·사법시스템 개혁의 당위를 외면하고 있는 한국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한국당은 지금이라도 개혁 열차에 탑승해야 한다.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정치·사회 혁신의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건 명백한 퇴행이자 반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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