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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세월호 의인'도 비켜가지 못한 '블랙독'의 씁쓸·살벌한 현실

ⓒ tvN 화면 갈무리

 

'블랙 독'(black dog). 검은색 개가 흰색 개에 비해 입양이 어려운 상황을 빗댄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이 단어는 검은 개를 터부시해온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검은 개'라는 의미 외에도 ‘우울증’, ‘낙담’이라는 부정적 뜻이 내포돼있다. 

블랙독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tvN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다. 수학여행 도중 발생한 전복 사고로 고하늘(서현진 분)은 버스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하늘은 극적으로 구출되지만, 선생님은 뒤늦게 빠져나오다 목숨을 잃는다.

힘겹게 선생님의 장례식장을 찾은 하늘. 그러나 하늘은 이 자리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오열하는 부모 앞에서 "아드님은 진짜 선생님이 아니예요. 기간제에요. 계약직 선생이라구요"라는 학교 측의 차가운 반응을 보게 된 것.

이후 하늘은 사고 터널을 찾아 되뇌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 저는 그 답을 꼭 찾아야겠습니다"라고. 자신을 살리고 떠난 선생님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혼란스러웠던 하늘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혀 보기로 한다.

블랙독은 기간제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기존의 학원물과는 다른 현실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방송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방송 이후에도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이지만 '진짜 선생님이 아닌' 기간제 교사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기간제 교사에 대한 학교 안팎의 차별과 불평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간제 교사는 정규직 교사의 휴직·파견·연수 등으로 결원이 생기거나 특정 과목을 한시적으로 담당하는 교사가 필요할 때 기한을 정해 채용하는 교사다.

지난해 12월 31일 한국교육개발원이 출판한 연구보고서인 '초·중·고 교원 구성 현황 및 추이 분석'(책임연구자 김혜진, 연구진 김혜자·백승주)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사립 중·고등학교의 기간제 교사 비율은 각각 23.21%, 23.18%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공립 중·고등학교는 각각 17.84%, 17.53%).

사립 중·고등학교의 경우 전체 교원의 4명 중 한 명, 국·공립의 경우 5명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이라는 얘기다. 정교사와 크게 차이 없는 업무를 하고 있음에도 기간제 교사는 현실에서 부당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약 기간이다. 기간제 교사는 짧게는 몇 개월, 길어야 1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다. 정규직 교사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대체품으로, 학교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모품으로 기간제 교사는 1년 남짓한 한시적 기한을 부여받는다. 

비용 절감을 위해 방학 기간을 계약에서 제외하는 '쪼개기' 계약도 횡행하고 있다. 호봉 제한과 인센티브 차별 등을 겪는가 하면, 과도한 업무와 남들이 기피하는 일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유는 하나, 단지 그들이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불이익을 참고 견뎌내지만 학교 측은 언제라도 계약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학교 측이 쥐고 있기 때문에 기간제 교사는 늘 고용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부당한 처우와 차별에도 학교 측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간제 교사에게는 현실이 지옥이다.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차별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맛봐야 하며, 동료들과의 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한다. 정규직이라는 희망고문 앞에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정체성을 의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기간제 교사의 '꼬리표'는 죽음 이후에도 따라 붙는다. 버스에 갖혀있던 제자의 목숨을 구하고 희생된 선생님에게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떠났지만 그의 숭고한 죽음이 삶의 등급까지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서도 기간제 교사였다.

블랙독의 불편한 진실은 드라마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들을 구하다 희생된 고 김초원 교사의 유족이 경기도교육청을 상대로 제기한 25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단원고 2학년 3반 담임이던 김 교사는 세월호 침몰 당시 5층 객실에 있었지만 4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의 구조를 돕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 교사는 고 이지혜 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학생들 곁을 지키던 '세월호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자들을 살리겠다고 사지로 뛰어든 '의인'조차 블랙독의 씁쓸한 현실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수원지법 민사1부(부장판사 장재윤)는 8일 "기간제 교원이 국가공무원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대법원 판단이 나오지 않았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을 인정하며 경기도교육청의 손을 들어줬다.

경기도교육청은 2016년 8월부터 '기간제 교사 맞춤형 복지제도'를 수립해 시행해오고 있다. 공무원의 질병·상해사망 보험 및 암 진단비 등 단체보험 가입과 그 외 건강관리·자기계발·여가활동·가정친화활동 등을 일정 금액 내에서 지원하는 제도다.

그러나 경기도교육청은 세월호 사고 당시 희생된 '김초원·이지혜' 교사를 소급·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두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맞춤형 복지제도를 개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음에도 정작 당사자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10월 29일 발표한 '2019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9년 8월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748만1천 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임금노동자(2천55만9천 명) 가운데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36.4%로, 이는 2007년 3월 조사(36.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통계가 말해주듯 비정규직은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다. 열악한 근로조건과 노동현실은 불평등과 차별을 양산시키고, 이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금수저냐 흙수저냐에 따라 삶의 등급이 나눠지고,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보상과 처우가 달라진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헌법 제11조 1항)고 돼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저같은 낭만이 끼어들 틈을 허락치 않는다.

자본의 논리 앞에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깨져 나간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기간제라는 이유로,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아빠와 엄마, 친구가 해고와 파면의 위기에 내몰린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이들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 제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희생했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블랙독(비정규직·기간제·계약직)이 늘어간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차별과 불평등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개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의 질까지 현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시스템을 개혁하고 처우 개선과 안전망 확충 등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 이유일 터다. 이는 제도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품격'에 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