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기록들이 있다. 메이저리그 조 디마지오의 61경기 연속안타, 피트 로즈의 4256안타, 놀란 라이언의 통산 최다 탈삼진 5714개, 사이영의 통산 승수 511승 등은 현대 야구에서 도저히 깨기 힘든 기록으로 남아있다. 여자 단거리의 제왕으로 손꼽혔던 그리피스 조이너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기록한 100m, 200m 세계기록인 10초 49와 21초 34는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프로야구가 태동한 1982년 당시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뛰었던 백인천 선수가 기록한 4할1푼2리의 타율은 '난다긴다'하는 선수들이 수 십 년간 도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2017년 은퇴한 이승엽의 465 홈런 역시 당분간 깨지지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프로농구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희정의 1000경기 출장이나 서장훈의 '1만 득점-5000 리바운드'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일 테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이 논리파괴형 수사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이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대중의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는 점에서, 대체불가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스포츠 기록과 비교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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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람들이 '돈 없어'를 외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다. 전두환의 '전 재산 29만원' 발언이 바로 그렇다. 13일 전두환의 전설적(?) 발언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연출돼 화제가 됐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 측 김효재 전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 전 의원은 이날 서울 대치동 이 전 대통령 사무실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검찰 수사가 정치 보복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문제의 발언은 김 전 의원이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검찰 출신 정동기 변호사가 변호인단에 합류하지 못한 것에 유감을 표명하는 과정 중에 불거졌다. 김 전 의원은 "아시다시피 이 전 대통령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고, 서울시장 4년간 월급 한푼 받지 않았다"며 "변호인단은 매우 큰 돈이 들어가는데 재정적으로 약간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돈이 부족해 변호인단 구성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뜻일 테다.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던 전두환의 주장(전두환의 아내 이순자씨는 회고록을 통해 내용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변호인단 구성이 힘들다'는 이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을 납득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이 전 대통령 측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변호사 비용이 부족하다는 주장은 여전히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을 잠시 과거로 돌려보자.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 전 대통령은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이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하는 데 쓰였으면 한다"며 "우리 내외 살 집 한 채만 남기고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공개적으로 재산 헌납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3년 뒤, 이 전 대통령은 약속(?)대로 '청계재단'에 약 330억 원을 환원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청계재단은 이 전 대통령이 직접 만든 장학재단이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의 재산 환원은 의심스런 정황이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시점부터가 석연찮았다. 이 전 대통령이 재산 환원 의사를 밝힌 건 2007년 12월 7일이었다. 대선을 바로 목전에 둔 대단히 미묘한 시기다. 이에 일각에서는 BBK 의혹, 도곡동 땅 실소유주 의혹 등 갖은 논란에 시달려온 이 전 대통령이 기부를 통해 재산 관련 의혹을 털어내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청계재단 임원진의 면면도 범상치 않았다. 대학동기이자 후원회장을 역임했던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이 이사장에 임명되는 등 청계재단의 주요 임원진이 이 전 대통령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청계재단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채무를 변제해 나가고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대선 당시 친구인 천신일씨로부터 빌린 30억 원을 청계재단 소유의 대명주빌딩에 근저당을 설정해 대출을 받은 뒤 갚아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9월 29일 tbs 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쇼'에 출연한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이 주장한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청계재단에는 주식회사 '다스'의 지분 일부도 유입된 상태다. 이 전 대통령의 처남인 고 김재정씨의 지분 5%가 지난 2011년 청계재단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전 대통령의 형 이상은씨는 다스의 최대주주가 됐고, 청계재단은 5%의 지분으로 3대 주주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상은씨와 청계재단의 주식을 합치면 50%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상은씨와 청계재단이 힘을 합칠 경우 다스의 주요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스 실소유주 의혹과 맞물려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집 한 채만 남기고 전 재산을 기부해 설립했다'는 청계재단은 이처럼 재단의 설립과정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숱한 의혹에 휩싸여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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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와 청계재단 등 차명재산 의혹은 논외로 치더라도, '변호인단을 구성하는 데 재정적 어려움이 있다'는 이 전 대통령의 주장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지난 2013년 관보에 공시한 이 전 대통령의 재산은 46억3146만원에 달한다. 이 중 예금은 9억5084만원이다. 13일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내외가 보유한 대지와 주택은 공시가격이 68억여 원, 시세를 합쳐 백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되고 있는 차명재산을 빼놓고도 이 전 대통령의 재산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논란이 커지자 이 전 대통령 측은 관련 발언은 '대형 로펌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할 여력이 없다'는 취지였다고 진화에 나섰다. 여론의 반응이 싸늘해지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요,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인 격으로 보인다. 뇌물혐의 액수가 100억여 원에 달하고, 횡령과 배임, 탈세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전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돈이 없어 변호사 선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니 뭇사람들의 심기가 뒤틀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하다는 전두환의 읍소에 이어, 이번에는 이 전 대통령 측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같이 궁색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정적 문제 때문에 변호인단 구성이 어렵다는 이 전 대통령 측의 하소연이 이해는 된다. 무려 16개에 달하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전 대통령의 방어권을 위해서는 변호인단을 대폭 늘려야 할 터다. 지리한 법정 공방에 따른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더구나 차명재산 혐의를 받고 있는 마당이니 말마따나 자금 조달 역시 쉽지 않을 테다. 이 전 대통령 측의 곤궁함이 이해가 되는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해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한다. 삼성 측에 수임 의뢰를 해보면 어떨까. 삼성은 국내 최고 수준의 변호인단을 보유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어디 이뿐인가. 70억 원에 이르는 BBK 투자금 반환 소송비용을 대납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이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다. 대형 로펌을 생각하고 있는 요량이라면 실력으로 보나, 과거의 인연으로 보나 삼성만한 곳이 또 없을 터다. 어떤가. 삼성 측에 수임을 의뢰해 보는 것 말이다. 갈 길이 먼, 지난하고 고단한 싸움이다. 측근마저 등을 돌린 고립무원의 처지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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