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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근혜의 돌발 인터뷰, 매만 벌었다.

ⓒ 오마이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한다', '안 한다' 말이 많았던 '끝장토론' 대신 인터넷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당초 청와대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와 관련해 '끝장토론' 형식의 기자회견을 연다는 복안이었다. 설 연휴 전에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겠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박 대통령이 헌재의 출석 요구에는 응하지 않은 채 여론전만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에 기자회견을 설 연휴 이후로 연기하는 방안이 거론되었고, 법률자문단 내에서는 기자회견 무용론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해명을 할 때마다 여론이 더 악화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논의 끝에 설 연휴 전 기자회견은 없던 일이 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에게는 속도전에 나선 헌재의 탄핵심판, 턱 밑까지 다다른 특검 수사,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의혹 등에 맞서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박 대통령이 부정적 여론이 거세게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인터뷰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날의 인터뷰는 모두의 예상을 깬 깜짝 인터뷰였다. 박 대통령이 팟캐스트를 이용해 입장 표명을 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치권은 허를 찔렸고, 국민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깜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날의 인터뷰는 상당히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몇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박 대통령은 인터뷰 상대로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을 선택했다. 익히 알려진대로 정 주필은 대표적인 보수논객이다. 그는 TV 토론과 정치 칼럼은 물론 최근에는 팟캐스트 <정규재TV>를 운영하며 극우적인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왔다. 정치 성향상 박 대통령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물인 셈이다.

실제 정 주필은 지난 8일 오전 KBS 1TV '생방송 일요토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평해전 났을 때 일본에 축구 보러 갔다. 그렇다고 해서 탄핵되지 않았다", "정유라가 적백수배를 받았는데 정유라가 빈 라덴이냐", "무소불위 (검찰이) 엄청난 권력으로 폭력 수사를 휘두르고 있다"고 말하는 등 박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



ⓒ 오마이뉴스


아니나 다를까. 모두의 예상대로 이날 정 주필은 박 대통령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에 아주 충실했다. 일단 '박 대통령의 육성 반격'이라는 제목부터가 인터뷰의 기획 의도와 방향이 훤히 드러날 만큼 노골적이다. 인터뷰의 내용 역시 제목 그대로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의혹을 철저히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거세게 반격하기까지 했다.

이날 박 대통령과 정 주필의 인터뷰는 한편의 잘 짜여진 각본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 주필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의혹 위주로 인터뷰를 진행해 나갔고, 박 대통령은 그의 노련한 리드에 발맞춰 관련 의혹을 일일히 해명해 나갔다. 이 흐름은 1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달라지지 않았다. 1시간 동안 박 대통령은 정 주필이 깔아넣은 멍석 위에서 마음껏 춤을 췄다.

이날의 인터뷰가 사전에 치밀하고 정교하게 기획되었다고 느껴지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정 주필의 질문에 막힘없이 유려하게 대응해 나갔다. 박 대통령 특유의 횡설수설도 없었고, 논점을 흐리는 '이, 그, 저' 따위의 수사나 논리파괴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말의 호흡도 짧았고, 적극적이면서도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만 간명하게 전달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동안 박 대통령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당장 지난 1월 1일 있었던 기자간담회만 하더라도 조어능력에 심각한 문제를 내보이던 대통령이었다. 중언부언은 물론이고 두루뭉실한 모호한 화법, 주어와 목적어가 뒤섞인 뒤죽박죽 발언이 내내 이어졌었다. 그러나 이날은 확실히 달랐다. 박 대통령은 작심한듯 할 말을 쏟아내면서도 막힘이 거의 없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박 대통령의 극적인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박 대통령의 출중해진 언어구사능력을 확인한 것을 제외하면 이날의 인터뷰가 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내용 일색이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자기합리화와 자기방어논리를 펴는데 주력했다. 사과나 반성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 사태가 미리 기획한 음모라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자신은 거짓말의 산에 갖힌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박 대통령과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한때 박 대통령과 한솥밥을 먹던 바른정당의 장제원 대변인은 아예 대놓고 "보기 민망할 정도"라며 자성을 촉구했다. 같은당의 오신환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국민과 민심에 정면으로 맞서는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의 친정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시기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아쉽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여당의 평가가 이럴지니 야당의 논평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일찌기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책임윤리를 언급하며 정치의 결과가 신념에 어긋난다고 해서 세상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정치인은 반드시 정치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그와는 정반대다. 정치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외부 탓으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막중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책임윤리가 결여된 정치인이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박 대통령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거짓말로 쌓아올린 거대한 산"이라며 자신에게 쏠린 의혹을 모두 거짓말이라고 규정했다. 기가 막힌 비유다. 박 대통령의 불분명한 말이 초래한 그동안의 국민적 혼란을 감안하면 그 사이 확 달라진 언어구사력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진일보한 언어감수성이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전히 무책임하고 뻔뻔하기만 한 대통령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기 때문이다.

저잣거리에선 이런 경우를 가리켜 '매를 번다'고 말한다.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못되는 박 대통령이 새겨들을 만한 경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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