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은 이제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 한국당이 과거에 보였던 극단적인 우경화로 가지 않을 것이다. 당원들이 굉장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일시적 굴곡은 있겠지만, 크게는 올라갈 것이다"
임기 종료를 눈앞에 둔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 오마이뉴스
김 위원장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당의 우경화 논란에 대해 " 우리 시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물이 한 번씩 굽이친다고 해서 다른 데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며 "지나친 주장이 있어도, 또 우려되는 움직임이 있어도 다 용해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우경화 현상에 대한 우려를 일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기대와 바람과는 달리 최근 한국당이 2.27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급속한 보수우경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각계에서 비판과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는 배경입니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공청회'에 참석한 이종명 의원과 김순례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5·18 유공자´를 "괴물집단”으로 지칭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김진태 의원 역시 영상 메시지를 통해 "5·18 문제만큼은 우파가 결코 물러서면 안 된다"며 '5·18 망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의원들의 몰지각한 망언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한국당 지도부입니다. 나 원내대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고 했고, 김 위원장은 "보수정당 안에 스펙트럼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도부의 안일한 인식은 거센 역풍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여론이 요동치며 질타와 비난이 잇따르자 나 원내대표는 결국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5·18 희생자들에게 아픔을 줬다면 유감을 표한다"고 진화에 나섰고, 김 위원장 역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 문제로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5·18 희생자와 유가족, 광주 시민들께 당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진 뒤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역사적·법적 평가가 명확히 내려진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5·18 망언'이 해석의 문제가 될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당 지도부는 소속 의원들의 뒤틀린 역사인식에 단호하게 대응하기는커녕 어정쩡하게 봉합하려다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본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입니다. 지도부의 인식이 이 모양이니 당 윤리위의 징계가 반쪽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의원직 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임에도 윤리위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솜방망이 처벌로 빈축을 샀습니다.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역시 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당의 미래를 가늠하는 전당대회가 막말과 망언, 반헌법적·반민주적 행태가 난무하는 '아무말 대잔치'로 전락한 것입니다. 특히 '아스팔트 우파'로 불리는 태극기부대는 행사장마다 떼로 몰려다니며 상대 후보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붓는가 하면, 연설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볼썽사나운 행태를 일삼았습니다.
지난 18일 대구·경북 합동연설회장에서는 '5·18 망언' 사과와 징계조치에 반발한 태극기부대가 김 위원장에게 “빨갱이” “너네 당으로 가라”는 고함과 욕설을 퍼부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오세훈 후보를 향해서도 고성과 비방을 쏟아부었습니다.
청년 최고위원에 도전하는 김준교 후보는 "저딴 게 무슨 대통령인가. 문재인을 민족 반역자로 처단해야 한다", 짐승만도 못한 주사파 정권", "문재인정권을 탄핵시키지 않으면 자유대한민국이 멸망하고 통일돼 북한 김정은의 노예가 될 것" 등의 원색적인 막말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한국당 내에서조차 “전당대회가 일부 극우 세력의 놀이터가 되어선 안 된다”(김무성 의원), "이런 식의 극단적 표현을 하고 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경계해야 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없어져야 할 일"(이완구 전 총리)이라는 강한 비판이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어쩌면 차기 당권이 유력해 보이는 황교안 전 총리의 행태일지도 모릅니다. 황 전 총리는 19일 TV 토론에서 박 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 "사법절차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와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객관적인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정치적 책임을 묻고 탄핵을 결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국회의 탄핵소추 절차와 헌법재판소의 심의 과정을 거친 탄핵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21일 TV 토론에서는 '태블릿 PC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보고 있다"라고 답해 다시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태극기부대 등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태블릿 PC 조작 의혹이 법원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대로 넘길 수 없는 발언을 한 셈입니다.
ⓒ 오마이뉴스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차기 당권에 가장 근접해있다고 평가받는 황 전 총리가 반헌법적·반민주적인 인식을 서스럼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당이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강경보수세력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과 떼놓고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살펴본 것처럼 한국당 내 태극기부대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1야당의 전당대회가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부정하는 태극기부대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현실이 이를 여실히 방증하고 있습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배박'(배신한 친박) 논란에 휩싸였던 황 전 총리 역시 이같은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더욱이 황 전 총리에게는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가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을 인정하는 순간 태극기부대의 타겟이 되는 것은 물론 '탄핵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태극기부대의 입김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한국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18 망언' 논란과 전당대회 막말 파문 등을 거치는 동안 현 한국당 지도부에게 강경보수세력의 준동을 제어할 능력과 리더십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국당의 미래권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황 전 총리는 헌법과 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인식과 언행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단적 우경화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김 위원장의 기대가 난망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지금처럼 극우강경보수 세력에게 휘둘린다면 한국당의 퇴행은 불가피합니다. 미래 역시 지극히 불투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당은 허약하지 않을지 몰라도, 시대정신을 쫓으려는 사회공동체의 의지와 염원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하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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