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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무현의 '대연정', 문재인의 '국정상설합의체', 그 명암에 대하여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대연정' 관련 일화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2002년 12월26일 민주당 중앙선대위 당직자 연수회에 참석해 "지역대결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더라도 무엇이든 양보할 생각이 있다"며 야당과의 연정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이후로도 노 전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과 연정을 연계시키는 발언을 계속 이어갔다. 2013년 1월18일 TV인터뷰에서는 "어느 지역도 한 정당이 70~80% 이상 석권하지 못하도록 해 지역구도가 극복되면 프랑스식으로 과반수 정치세력이 총리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소신을 드러냈다.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03년 4월2일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는 "지역구도는 반드시 해소되야 합니다. 지역구도를 이대로 두고는 우리 정치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년 총선부터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2/3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여야가 합의해 선거법을 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저의 제안이 내년 17대 총선에서 현실화되면 저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망국적인 지역구도를 허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총리 결정권과 내각 구성권 등 대통령의 권한 일부를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게 이양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지한 것처럼 노 전 대통령의 고뇌가 묻어있던 대연정 카드는 실패로 귀결됐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반대와 비판을 이어갔다. 시민사회의 반응 역시 떨떠름했다. 특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국정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재보선 패배로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의 과반 의석마저 무너진 상황이었다. 정부·여당의 국정동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대연정은 선거제도 개혁에 방점이 놓여있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해보기 위한 고심이 묻어있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자신의 권한마저 내놓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희생은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정치적 술수로 오인받았고,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한편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화두에 앞서 노 전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5년 7월27일 노 전 대통령이 발표한 '당원 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연정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여소야대 구조 때문입니다. 여소야대는 정상적인 정치구조가 아닙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여소야대 구조로 국정을 운영하는 사례가 없습니다. 여소야대 구도로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88년 이래 여러 차례 여소야대 정치의 실험을 해 왔습니다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역대 정권 모두 3당 합당이나 정개개편으로 여소야대의 구조를 해소해 버렸습니다. 여소야대로는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과거 미국에서 여소야대가 있었던 예를 들어 여소야대 구조 아래에서도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런 인식은 맞지 않습니다. 미국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고 우리 정치와도 많이 달라서 본보기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도 여소야대라는 비정상적인 정치구조를 청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협박이니 매수니 하는 공작정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우리 정치도 이제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정치 행위를 통하여 정치구조를 정상화해야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구도에서 비롯되는 국정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연정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승자독식 구조인 현행 선거구조 아래에서는 정치세력간의 생산적 제휴나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제의 특성상 정권 획득을 위해선 정당간 대결과 경쟁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극단적 정쟁과 대립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대결과 분열의 정치는 정치불안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국정난맥으로 이어지기 쉽다. 노 전 대통령이 그 비근한 예다. 참여정부 내내 그는 한나라당의 거센 공격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고, 이 흐름은 정권이 바뀔 때까지 계속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같은 상황은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다. 여소야대 국면으로 출발한 문재인 정부 역시 제1야당인 한국당과의 정치적 합의 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결과 각종 개혁 과제가 좌초되거나 민생 입법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 한겨레



문 대통령이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여야 5당 대표와의 비공개 만찬 회동에서 '여야정 국정상설합의체' 재개를 제안한 것도 이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 처리하기 힘든 여소야대 국면의 현실을 고려한 결단인 셈이다.

문제는 국정상설합의체가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데에 있다. 지난 2018년 11월5일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합의했던 국정상설합의체는 1년이 넘도록 가동되지 않았다. 당시 여야는 12개 조항에 달하는 합의문을 이끌어냈지만, 문 대통령이 조명래 환경부 장관과 김수현 정책실장을 임명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개선의 기미가 전혀없는 소모적 정쟁 구도 역시 국정상설합의체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제1야당인 한국당의 반대 기류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생산적인 대화와 타협, 합의의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실제 한국당은 자신들의 대선공약이었던 개헌, 최저임금 인상 의제를 비롯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제 개편 등 주요 정치 현안과 관련해 여러 차례 말을 바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존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주장으로 정치공세를 펴면서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눈총까지 받고있는 실정이다.

노 전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여소야대 구도에서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나라처럼 정치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환경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를 반영하듯 20대 국회의 법안통과율은 역대 최악을 기록 중이다. 대화와 타협, 포용의 모습은 실종되고 불신과 대립, 반목을 이어가며 정치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 처리해야 할 각종 개혁 과제와 민생 입법은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문 대통령의 '국정상설합의체' 제안은 이런 가운데 나왔다. 대통령이 의도한 대로 합의체가 잘 가동될 수만 있다면 정치다운 정치, 생산적인 정치로의 복원을 기대해 봄직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고 가혹하다. 문 대통령의 제안이 현실 정치의 벽을 뛰어넘기 어려워보이는 이유다.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대연정 제안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었다"고 회상했다. 요컨대, 우리 정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적'인 제안이었다는 술회다.

그런 면에서 문 대통령의 국정상설합의체 재개 제안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망국적인 지역주의 폐단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연정이든, 국정합의체든 무엇이든 시도해 봐야 한다. 그러나 생산적인 대화와 타협, 합리적 토론이 요원한 현행 정치 구도 아래에서는 효과는 미지수다.

국가적 과제와 정책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되, 결과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합리적 정치세력이 양립할 때라야 포용의 정치, 상생의 정치, 합의의 정치가 꽃을 피울 수 있다. 정치 구도와 지형을 바꾸는 것이 먼저여야 하는 이유다. 정치·사회 개혁의 시발점은 정치적 상상력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