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에 따르면 국회의원 임기 만료까지 잔여 임기가 6개월 이내인 경우는 의원총회 결정에 의해서 임기 만료시까지 원내대표 및 정책위의장 임기를 연장할 수 있게 돼있다. 경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하는 의원들이 있어서 내일(4일) 의원총회를 열어 의원들에게 재신임 여부를 묻겠다"
자신의 거취를 두고 당 안팎에서 이런 저런 말들이 잇따르자, 3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하루 뒤 열릴 의원총회에서 재신임 여부를 물어볼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동료 의원들에게 원내대표 임기 연장 여부를 확인해보겠다는 취지입니다. 내심 임기 연장을 바라는 나 원내대표의 계산이 깔려있는 발언이었습니다.
이미 당내에서는 차기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 강석호 의원을 비롯해 유기준-심재철 의원 등이 출마를 저울질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 원내대표는 의총 결과에 따라 6개월 이내에 한해 임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 당헌-당규를 앞세워 내년 총선까지 원내대표 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거취 문제를 4일 의총으로 끌고 가려던 나 원내대표의 바람은 불과 몇 시간만에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임기 연장의 키를 쥐고 있던 황교안 대표가 이날 오후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나 원내대표의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고위의 재신임 불허 방침에 따라 나 원내대표의 임기는 오는 10일로 끝나게 됩니다. 나 원내대표의 지난 1년,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나 원내대표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보겠습니다.
시작은 화려했습니다. 2018년 12월 11일 나경원 의원은 한국당 경선에서 김학용 의원을 33표(68대 35) 차이로 누르고 원내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나 의원은 경선 과정에서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이는 선거 결과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당시는 김병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던 시기였습니다. 국정농단과 박근혜 탄핵의 후폭풍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있던 한국당은 대대적인 인적 청산과 쇄신 압력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당 계파 갈등의 중심에 있던 친박계에 대한 물갈이 요구가 당 안팎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나 원내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계파종식을 통한 당내 통합부터 이뤄야 하고, 그 다음 보수대통합을 말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뿌리 깊은 계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당내 통합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후 당내에서 인적 청산 목소리는 급속하게 사그라들었습니다. 친박계를 겨냥했던 당내 혁신 작업 역시 흐지부지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나 원내대표가 친박계의 물밑 지원을 받고 당선된 것이 당내 혁신 작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일반적입니다.
친박계와의 전략적 공생을 선택한 이후 나 원내대표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나 원내대표는 당선된 지 4일 만인 2018년 12월 15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하며 대화의 물꼬를 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여야 5당 원내대표간 합의에 당내 비판이 속출하자 그는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지난 3월 10일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은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는 약속을 깨고, 의원 정수를 27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제를 없애는 내용의 선거제도 개편안을 내놓아 여야 4당을 '멘붕'에 빠트렸습니다. 여야가 오랫동안 협의해오고, 기다려왔던 선거제 개혁 논의를 일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김태우 특검', '신재민 청문회', '손혜원 투기 의혹 국정조사' 등을 요구한 한국당의 보이콧으로 국회가 장기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있던 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의 뜨거운 화두였던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 한국당이 그간의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비례대표 폐지안을 들고 나오자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20대 국회 들어와서 지금 자유한국당이 국회 보이콧을 16번을 선언했습니다. 1월 국회는 또 릴레이 단식하신다고 그렇게 됐고, 2월 국회에서는 자당의 전당대회가 사실은 실질적인 이유죠. 전당대회 치르느라고 국회 발목 잡아놓고 또 결국은 온갖 특검, 국정조사, 청문회 이런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선거개혁, 사법개혁, 민생개혁의 막중한 책무가 있음에도 보이콧을 남발하고 있는 한국당의 행태를 당시 이정미 대표는 저와 같이 꼬집었습니다. 처리해야 할 각종 민생-개혁 법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도 국회 등원을 거부한 채 투쟁 일변도의 전략을 고집하고 있는 제1야당을 향한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당 원내사령탑인 나 원내대표의 대여투쟁 기조는 점점 더 불타올랐습니다. 3월 12일 취임 후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낯뜨거운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해 본회의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는가 하면, 국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으로 진행된 패스트트랙 상정을 불법과 폭력으로 가로막아 국회기능을 마비시키기는 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한국당은 장외투쟁을 선언하며 또다시 국회를 등졌습니다.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 이후 80여일 동안 문을 굳게 걸어 잠궜던 국회는 6월 말이 돼서야 간신히 의사일정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3월을 제외하면 2019년 전반기 중 무려 5개월이나 '식물국회'와 동물국회'를 반복한 셈입니다.
후반기 국회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야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강대강으로 부딪혔습니다. 나 원내대표는 국정조사와 특검 등을 요구하며 대여투쟁의 전면에 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 원내대표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결국 조 전 장관의 사퇴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요. 조 전 장관 사퇴 이후 나 원내대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나 원내대표는 조 전 장관이 사퇴하는 데 기여한 인사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 의원들에 대해 공천 가산점을 부여하겠다고 했다가 당 안팎의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난달 미국 방문 당시 미국 측에 내년 총선 전 북미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도록 해 달라는 취지로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며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거세지자 나 원내대표는 "지난 7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방한 때 총선 직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여진은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선거법 개정, 공수처법 설치 등 패스트트랙 상정 법안들의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해 무더기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 역시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유치원 3법', '민식이법' 등 국민적 관심이 높은 민생 법안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는 것입니다.
한국당 최고위가 나 원내대표의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역시 이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 원내대표가 고수해온 투쟁 일변도의 전략에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비판 여론도 솟구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당 일각에서 인적 쇄신 요구까지 쇄도하자 당 정비 차원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나 원내대표는 '싸움닭'으로 불리던 김성태 전 원내대표 '저리 가라' 할 전투력으로 강력한 대여투쟁을 펼쳐왔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나 원내대표가 한국당을 이끌었던 지난 1년은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 부재의 시기였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달려왔던 나 원내대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도부의 불신임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장하게 된 나 원내대표의 1년을 훗날 역사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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