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은 황교안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도로친박당'으로 가고 말았다"(2019년 12월 28일), "아무 명분 없이 자유한국당과 합치는 식으로 통합하면 국민에 아무 감동도 안 준다"(12월 29일).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에 부정적이던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의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요. 지지부진하던 '보수대통합'의 물꼬가 마침내(?) 열리는 모양새입니다.
한국당과 새보수당, 보수우파 성향의 시민단체가 9일 중도·보수 통합을 명분으로 한 '혁신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를 만들기로 전격 합의했습니다.
이들은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중도·보수 대통합을 위한 정당·시민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고 중도·보수를 아우르는 통합 정당 창당을 위한 통추위 구성을 공식화했습니다.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박형준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가 추대됐습니다.
통추위 결성이 '보수대통합' 움직임에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동안 한국당과의 통합 가능성을 부인해오던 새보수당이 통추위 구성에 전격 합의한 배경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새보수당의 리더격인 유 위원장은 물론이고 하태경 책임대표 역시 그동안 방송·언론 인터뷰 등에서 한국당과의 통합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죠. 하 대표는 지난해 11월 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뭉쳐봐야 만날 지지고 볶고 싸우고 할 텐데 차라리 안 뭉치는 게 낫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국면이 일순간에 뒤바뀌었습니다. 통합에 난색을 표하던 새보수당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당이 논의를 주도해왔다면 지금은 새보수당이 더 통합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합은 없을 것'처럼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태입니다.
하 대표는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대표단 회의에서 "황교안 대표가 보수재건 3원칙에 대해 진정성 있게 확답한다면 우리는 공천권 같은 기득권은 내려놓을 것"이라 밝혔습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직접 '보수재건 3원칙'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기득권을 내려놓고 통합에 나서겠다는 뜻입니다.
하 대표는 통합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근본적인 혁신과 통합"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에 반대한다고 해서 아무나 다 끌어모으는 반문연대, 묻지마 통합이 아니라 보수혁신의 가치와 원칙을 중심으로 혁신·중도세력이 통합하는 혁신적 중도통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어떤가요. 합리적 개혁보수 정당을 만들겠다며 한국당을 박차고 나왔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 아닌가요. "한국당은 반드시 망하는 정당이다, 썩어빠진 보수에게 한 표도 주면 안 된다"(유 위원장), "다음 선거에서 한국당은 절대 민주당을 이길 수 없다, 딱 '친박영남당'으로 고립될 것이다"(하 대표)라고 핏대를 세우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정치는 생물이고, 선거 앞에서는 못할 게 없다는 속설이 그대로 입증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새보수당은 국정농단과 박근혜 탄핵 과정을 거치며 보수진영이 궤멸 위기에 빠지자, 왜곡된 보수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합리적 대안정당으로 바로서겠다며 한국당으로부터 분화돼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의 정치실험(바른정당·바른미래당)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낡은 보수 청산의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첨예한 노선 갈등, 리더십 부재, 한국당과의 차별화 실패 등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며 창당과 분당을 반복하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당과의 통합은 출구를 찾을 수 없던 새보수당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일지도 모릅니다.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쳇말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요.
기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유 위원장 등이 총선 전에 한국당에 합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펼쳐지는 이합집산이 정치권의 오랜 관행인 데다가, 새보수당의 총선 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보수진영은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분열된 상태로 선거를 치르다 참패를 당한 아픔이 있습니다. 선거에서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절박감은 한국당과 보수당을 통합열차에 오르도록 떠미는 또 다른 배경입니다.
문제는 명분입니다. 통추위는 ▲대통합의 원칙은 혁신과 통합이다 ▲통합은 시대적 가치인 자유와 공정을 추구한다 ▲문재인 정권에 반대하는 중도보수 등 모든 세력에 대한 대통합을 추구한다 ▲세대를 넘어 청년의 마음 담을 통합 추구한다 ▲탄핵이 장애물이 되서는 안된다 ▲대통합 정신 실천할 새로운 정당 만든다 등 6가지 통합 원칙 내세웠습니다.
통추위가 제시한 6대 원칙의 핵심 키워드는 '반문연대'와 '혁신과 통합'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 '반문연대'는 지난 대선 무렵부터 보수진영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고 있는 구호로, '비문연대'나 '빅텐트론', '제3지대' 등과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앞서 하 대표가 조금 달리 표현했지만 문재인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누구든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틀은 같습니다. 통추위가 최근 정계복귀를 선언한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에게도 문을 열어놓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번째 키워드인 '혁신과 통합'입니다. 총선까지의 일정 등을 고려하면 한국당과 새보수당 등은 통합에 방점을 둔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6대 원칙에 '탄핵이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통합 세력 간의 내부 갈등을 봉합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인 셈이죠.
한국당과 새보수당은 통합을 통해 보수혁신을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선통합·후혁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 어딘가 대단히 낯이 익습니다. 그동안 선거를 앞두고 정치공학적 '합종연횡'이 이뤄질 때 자주 목도하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여러 정당들이 '혁신과 통합'을 앞세워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인위적 결합의 결과는 대부분 좋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당내 패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반복하며 극심한 대립과 반목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혁신 없는 통합의 후과입니다. 혁신은 성찰과 반성, 책임이 전제될 때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당은 어떤습니까. 그동안 겉으로는 '혁신'을 운운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보여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보수·진보진영을 막론하고 한국당을 향해 '도로 친박당', '도로 새누리당'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새보수당이 이런 한국당과 통합하겠다고 합니다. '혁신과 통합', '보수혁신의 가치와 원칙', '혁신적 중도 통합' 같은 거창한 레토릭을 벗겨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 의문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통합 움직임이 뜨겁습니다. 보수대통합은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요.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쩌면 이미 그 답을 유 위원장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명분 없이 합치는 방식으로 통합을 한다면 국민에게 아무런 감동을 안겨줄 수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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