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놈만 팬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 나온 유명한 대사다. 이 대사를 20여년만에 소환한 당사자는 김성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다. 김 전 원내대표는 지난 2018년 8월 20일 경기 과천 공무원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2018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이 대사를 인용하며 '야성'을 강조했다. 당시 그가 했던 발언의 일부를 옮겨 본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나오는 대사처럼 '한 놈만 패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끝장을 보여준 이 투지는 사실상 가장 무서운 무기다. 비록 우리가 '주유소 습격사건'의 동네 조폭·건달은 아니지만 끝장을 볼 수 있는 끈기 있는 야당 구성원으로서 정기국회를 맞이하자는 말씀을 드린다."
이날 김 전 원내대표가 강조했던 '한 놈만 팬다'의 '한 놈'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안다. 한국당의 '한 놈만 패기'가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안마다 비판과 반대로 일관해왔던 한국당이 최근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공세의 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한국당은 이른바 '김태우 폭로 사태'와 관련해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사퇴 동향 문건을 '블랙리스트'라 규정하고 대통령 탄핵까지 거론하며 총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이다.
지난달 3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나경원 원내대표는 "정부는 무차별적으로 사찰했는데, 자신의 실세 비리는 묵인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1인 일탈로 얘기한다"며 "예전에 총리실 민간인 사찰에 대해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대통령이 '이런 사건은 대통령 탄핵감'이라고 얘기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지난달 27일에도 나 원내대표는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이명박 정권 시절 국무총리실 산하에서 일어난 사찰을 보고 '국기문란 행위', '탄핵이 가능한 사안'이라고 말했는데, 이번 사건들이 대통령 탄핵감인지 아닌지 답해야 한다"고 강하게 성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당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도로 이뤄진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과 이번 의혹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나 원내대표의 탄핵 발언은 지나친 정치공세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우 전 수사관은 청와대 특별감찰관 근무 시절 민간업자들에게 골프 접대를 받고 지인의 사건 수사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 피의자다. 폭로의 순수성과 신빙성이 크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당은 김 전 수사관을 공익제보자라 추켜세우며 연일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다.
김 전 수사관을 '공익제보자'라 보기 어려운 이유는 대검의 감찰 결과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대검은 지난달 27일 브리핑에서 '경찰청 특수수사과 수사 부당 개입 시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감찰 도중 사무관 셀프 임용 시도', '건설업자 등으로부터 골프 접대 등 향응 수수' 등 김 전 수사관의 비위 내용이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대검 발표는 특감반에서의 비위행위가 적발되자 구명을 위해 폭로전을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사퇴 동향 문건을 블랙리스트라 주장하는 것도 지나친 공세라는 지적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환경부 문건에 이름이 올라있는 21명 중 16명은 임기를 채운 것으로 확인됐다. 그 중에는 초과 근무를 하거나 심지어 현재까지도 근무하는 인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블랙리스트 인사와 단체에 불이익과 피해를 주고, 실행을 거부하는 문체부 공무원들을 솎아냈던 박근혜 정부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국당의 무리한 공세는 지난달 31일 열렸던 운영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날 이만희 의원(경북 영천시·청도군)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때문에 퇴사했다는 김정주 전 환경기술본부 본부장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역풍을 맞았다. 김 전 본부장이 과거 새누리당(현 한국당) 비례대표 23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운영위에 참석했던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정주란 분은 퇴임사까지 정상적으로 마치고 퇴임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박경미 민주당 의원(비례대표)은 "국회에서 섣달 그믐날 하루 종일 블랙리스트라고 떠든 환경부 문건은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다 공개돼 있는 내용이다. 거론된 24개 직위 중 상당수는 임기 만료, 혹은 초과 근무했고 임기 전 퇴직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블랙리스트 아닌 블랙코미디"라고 꼬집으며 한국당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최근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에 대한 한국당의 공세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청와대가 KT&G 사장 인사에 개입하고, 기재부에 국채 발행 압력을 행사했다고 신 전 사무관이 폭로하자 한국당은 상임위원회 5곳의 소집을 요구했다. 한국당은 신 전 사무관 보호를 위해 공익제보자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을 추진하는 한편 청와대 적자 국채 발행 의혹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개최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앞서 김태우 폭로 사태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기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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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 전 사무관의 폭로 내용을 반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와 기재부 사이에 국채 발행과 관련해 이견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청와대가 적자국채 추가 발행에 외압을 행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국가 재정과 같은 주요 정책은 청와대와 정부 사이의 긴밀한 의견 조정과 조절이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외압인지 아닌지는 사실관계를 좀 더 살펴야 하겠지만 적자국채 발행 의견 제시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청와대가 KT&G 사장을 교체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부분도 따져볼 문제다. 신 전 사무관은 기재부가 KT&G 2대 주주인 기업은행을 통해 인사개입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기업은행은 올 3월 백복인 사장의 연임 표결을 앞두고 '반대' 입장을 낸 바 있다. KT&G 사장후보추천위원회가 외부인사를 배제했고, 백 사장이 배임 혐의로 고발당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신 전 사무관은 이 과정에 기재부가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해석을 달리 할 여지가 있다. 지난 2015년 취임한 백 사장은 이후 금품수수 의혹과 납품비리 의혹 등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바 잇다. 올해는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인 '트리삭티(Trisakti)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업무상 배임 혐의로 전(前) 임직원들에 의해 고발당하기도 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갖은 비리 의혹과 구설에 휩싸였던 인물이 공기업이나 다름이 없는 KT&G 사장에 유임돼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설령 신 전 사무관의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의혹에 휩싸인 인사를 유임시키는 게 온당한지는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당은 전후 사정은 따지지도 않고 의혹을 확산시키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관련해 살펴봐야 하는 것은 청와대의 인사개입 의혹에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한국당의 과거 행태다.
"같은 이념과 국정철학을 가진 가진 사람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에서 그 정권의 이념과 국정철학에 맞추어서 임명된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되었으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과 국정철학에 맞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사의를 표하고 재신임을 묻는 것이 옳다. 뜻이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할 수는 없지 않겠나. 결국 뜻이 다른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업무의 비효율성으로 국민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이다. 참여정부의 인사를 '코드인사'라 비판하던 한국당은 집권에 성공하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전 정부 인사는 스스로 물러나라고 엄포를 놨다. 한국당의 잣대와 기준이라면 문제가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당 원내대표가 노골적으로 사퇴압력을 넣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랬던 한국당이 청와대의 인사개입 의혹 부풀리기에 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김태우·신재민 폭로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청와대는 김 전 수사관의 일탈을 미연해 방지하지 못했다. 해명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신 전 사무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치권이 의혹 확산에 나서면서 파장이 급속도로 커졌다. 특히 한국당은 확실한 사실규명이나 검증 없이 무분별한 폭로전에 가담함으로써 정치 쟁점화에 앞장서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한 놈만 팬다'는 한국당의 대여투쟁 행태가 새해에도 계속 이어질 태세다. 견제와 비판은 야당이 해야 할 역할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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