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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합의문 잉크도 안 말랐는데..연동형 비례 반대하는 한국당

"합의를 하기로 한 게 아니라 검토할 것을 합의하였다". 지난 17일 tbs <이슈파이터>에 출연한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5일 여야 5당이 발표한 '선거제도 개혁 합의문'을 한마디로 저렇게 촌평했다. 이날 정 전 의원은 합의문을 "대국민 속임수"라 단언하며 조목조목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선거제도 개혁 합의문에 대한 정 전 의원의 발언 중 일부를 옮겨본다. 

"적극 검토? 이건 안 하겠다는 얘기다. 1항부터 적극 검토다. 적극 검토하기로 했어, 적극 검토 우린 했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방식 등에 대해서 정개특위에 합의했다? 다수결도 아니고 합의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응을 보면 거의 물 건너갔다 이렇게 본다."

"합의에 따름? 합의를 안 할 거다, 자유한국당이. 그 다음에 석패율제 등 지역구도 완화를 위한 제도도입을 적극 검토? 이건 검토만 할 거다."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은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 합의를 안 하면 못 하는 거다. 정개특위 활동시한 연장? 연장 하면 된다."

"허술한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합의문이 아니다."

정 전 의원의 뼈 때리는 신랄한 비판이 결국 맞아떨어지는 모양이다.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형식적으로 합의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정 전 의원의 지적대로 국면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1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한국당 초·재선 의원들의 모임인 '통합과 전진'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완수 의원(경남 창원시 의창군)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비례의원을 늘리는 건 정당의 국회의원 추천권을 확대하는 것인데,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천권을 확대하는 건 국민정서에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백승주 의원(경북 구미시 갑) 역시 "안중근 의사가 좋아하는 말이 '견리사의'다. 이익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 무엇이 옳은가 생각해야 한다. 유불리를 생각하는 건 정말 맞지 않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당리당략적 차원이 맞다. 정말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한국당 의원총회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이어졌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한국당 간사인 정유섭 의원(인천 부평구 갑)은 "우리도 이제 수세적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하면 민심 그대로의 선거다, 사표를 방지하고 승자독식을 없애는 제도'라고 하는데 사실은 군소정당이 살아남기 위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기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특위에 참여했던 간사로서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당은 정개특위 간사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반대하고 있다. 이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구속력이 없는 여야의 모호한 합의가 갖는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거제도 개편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고착시키고,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하는 현행 소선거구제의 부작용과 폐해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적 담론은 정치권, 그 중에서도 한국당의 반대에 번번히 가로막혀 왔다. 

한국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반대하는 이유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기득권 정당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해왔던 민주당이 여당이 된 이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거대 정당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선거제도를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손학규·이정미 대표의 단식을 계기로 민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 속내야 어찌됐든, 일단 흐름이 바뀐 셈이다. 

문제는 한국당이다. 선거제도 개편은 결국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마음껏 누려온 한국당이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선거제도 개편을 반대해온 정당이 바로 한국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역시나'다. 정 전 의원의 일갈처럼, 한국당의 스탠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아닌 '검토'에 방점이 찍혀 있다.


ⓒ 오마이뉴스


선거제도 개편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국회의원 정수 확대 문제에서부터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수 비율 배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특히 의원 정수 확대 문제는 비례성을 높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부분임에도 국회 불신의 영향으로 부정적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 정치권이 앞장서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필요하다면 특권 폐지 등의 기득권 포기를 통해 국민의 이해와 설득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당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본색(?)을 드러내면서 시작부터 스텝이 꼬이는 모양새다. 한국당은 겉으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할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더니 그와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 1월 임시국회에서 선거제도 개편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함에도 논의 단계에서부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당 내부에서 선거제도 개편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것과 달리 시민사회에서는 그와는 다른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300여개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참여한 '범시민사회단체모임'과 500여개 진보 성향 시민단체의 연합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18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선거법 개정 방향 합의를 위한 시민사회 대토론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시민단체들은 비례성과 대표성 강화를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공감하며, 의원 정수를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에도 동의했다. 이들은 연동형 도입으로 인한 초과의석 문제나 권역별 정당명부 도입 등을 위한 숙의가 필요하다며, 국회의원에게 지출되는 비용의 축소와 특권 축소 등을 통해 정치권이 국민을 설득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 정당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고,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강한 만큼 정치권의 적극적인 의지와 기득권 내려놓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영 딴판이다. 특히 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던 취지가 무색하게 시작부터 물을 흐리고 있다. 

더욱 황당한 건, 연동형을 반대하는 구실로 한국당이 정수 확대에 반대하는 국민정서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겁하다. 국회가 불신의 온상이 된 데에는 한국당의 책임이 결코 적지 않다. 염치가 있다면 책임을 통감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획기적 전환점이 될 선거제도 개편에 앞장서야 마땅할 터다. 그러나 한국당은 요지부동이다. 기득권을 틀어쥔 채 30년 묵은 불판을 그대로 사용하자고 버티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의정 활동 내내 선거제도 개편을 위해 힘써 왔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2004년 KBS <심야토론>에 출연해 이른바 '삼결살 판갈이론'을 주장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노 원내대표의 촌철살인 비유 그대로다. 한국당은 불판이 타든 말든 상관 없다는 태도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시커멓게 탄 고기를 계속해서 먹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시대적 과제인 선거제도 개편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그들의 눈에는 정치가, 국민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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