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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정원은 정말 개혁될 수 있을까?

ⓒ 오마이뉴스


"국가정보기관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다면 국가 안보가 위험해진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다. 국정원이 해야 할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국정원장으로 봉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직 국가와 국민에 헌신하는,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그리고 구성원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하는 국정원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 국정원은 앞으로 국내 정치와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29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국정원이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국정원장에 오를 경우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조직을 혁신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이어 국정원은 정권을 비호하는 곳이 아니라며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서 후보자는 "국가정보기관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다면 국가 안보가 위험해진다"는 독특한 신념과 철학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전임 정부에서 국정원은 국가 안보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야당과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시민들 때문에 위험해진다고 공공연하게 밝혀온 터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통해 4대강 사업, 천안함 문제, 세종시 문제 등 국내 주요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국정원이 국내의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개입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국정원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비판하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 시민단체 등은 물론이고 민주노총과 전교조, 종교단체까지 종북으로 '꼭' 찝어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국가 안보를 사수해야 한다는 국정원의 맹목적 신념은 급기야 지난 18대 대선에 불법개입하는 경지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국정원은 당시 심리전단에 총 70여명 규모의 사이버팀 4개를 조직하고 문재인 후보를 '문죄인', '종북좌파' 등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인터넷 게시글에 찬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해 나갔다. 대선 직전에는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은 이른바 '국정원 사건'을 일으켜 온 사회를 전율케 만들기도 했다. 국정원에게 국가 안보는 이처럼 천인공노할 범죄마저 서스럼없이 저지르게 만들 만큼 중차대한 문제였다.

국정원의 국가 안보 맹신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국정원 사건'의 여파로 온 나라가 홍역을 앓던 2013년 1월 국정원은 돌연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이었던 유우성씨가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유출했다며 검찰에 기소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결국 지난 2015년 10월29일 유씨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 확정 판결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대대적인 개혁과 혁신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시점에 정작 국정원은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 공작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2015년 7월에는 국정원이 '5163부대' 이름으로 이탈리아 해킹업체인 'Hacking Team'을 통해 도·감청 해킹프로그램을 구매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국정원은 이 프로그램을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 용도로 사용했다는 의혹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2016년 12월에는 국정원이 양승태 대법원장을 포함한 고위 법관과 소설가 이외수씨 등의 동향을 사찰해왔다는 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문건은 지난 2014년 초 국정원이 작성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고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국정원이 국가 안보를 위해 감행한 일들이 대개 이러했다. 정치·사회·문화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개입해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시민들을 종북좌파로 낙인찍는가 하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수사를 동원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야당 대선후보를 향해 욕설을 남발하기도 했다. 여론조작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작동원리를 훼손하기도 했고, 시대착오적인 불법선거개입으로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를 유린하기도 했다.

국정원의 기행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횡행했던 간첩조작 사건을 21세기에 재연시켰는가 하면,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인 사찰 의혹으로 시대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노골적인 지역감정 조장과 여론조작을 통한 불법선거개입, 간첩조작, 사법부 및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 등이 '국가 안보'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의 국정원이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구태를 재연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같은 국정원의 비정상성을 설명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제가 국정원장이 된다면 '이제 정말 국정원이 바뀌었다. 정말 국정원이 정치개입 하지 않고 국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부서다' 하는 걸 느끼도록 한번 바꿔보겠습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2009년 2월 인사청문회에서 밝힌 포부는, 놀랍게도, 저랬다. 워딩의 차이가 있을 뿐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원천적으로 금지돼야 하며, 국정원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한 원 전 원장과 서 후보자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의 대국민 약속이 얼마나 처참하게 뭉개졌는지 모르는 국민은 없다. 국가 안보를 금과옥조로 여겼던 국정원은 이후 국민의 불신을 한 몸에 받는 군색한 처지로 내몰리게 됐다.  


국정원을 향한 국민의 신뢰를 국가 안보와 연결시키려는 서 후보자의 태도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래서다. 서 후보자의 인식이 정권의 안위와 체제의 안정을 국가 안보와 등치시켜온 권위주의 정부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서 후보자의 인식에서는 국민을 정권유지를 위한 통제와 계몽의 대상이 아닌 주권을 가진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민주적 면모가 엿보인다.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이 국가 안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분에서 이는 도드라진다.

서 후보자의 웅변처럼 국정원은 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국정원이 특정 정권을 위한 조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새 정부의 과제인 적폐청산의 방점은 결국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것에 찍혀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뼈를 깎는 개혁 만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첩경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들 스스로가 답을 내놓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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