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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세현 전 장관의 일침..보수진영 논리대로라면 미국만 득본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또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가 같이 가야 한다고 그러는데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야죠. (그런데)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 맞지만 어느 한쪽이 앞서가면서 여건을 조성하고 그 다음에 또 촉진하는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자전거도 양쪽 페달을 똑같이 밟고 있으면 자전거 안 나가요. 왼쪽이든지 오른쪽이든지 먼저 하나 밟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퀴가 돌아가고 앞으로 나가고 사람도 왼발이든지 오른발이든지 한 발 떼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국이 먼저 나가주면 좋은데 안 나가니까 우리라도 먼저 한 발 떼면서 손을 끌고 이쪽으로 갑시다 이렇게 해야 하고 그러는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공동보조론 취하는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들 강시처럼 걸을 수 있냐. 강시. 깡충깡충 뛰면서.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은. 정치도 외교도 생물입니다."


ⓒ 오마이뉴스


'빵' 터졌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입에서 '강시'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김어준 공장장은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 특유의 너털웃음을 마음껏 내질렀다. 어디 김어준 공장장뿐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방송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청취자가 (필자와 마찬가지로) 이 대목에서 박장대소 했을 터다. 그러나 웃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남북관계와 비핵화를 둘러싼 정 전 장관의 해석은 명쾌했고 날카로웠으며,아주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 


19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2부에서 정 전 장관은 최근 한미공조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보수진영 일각의 행태가 마치 '강시'와 같다고 꼬집었다. 평양정상회담 합의문 이행에 속도를 내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 대북제제 기조를 유지하려는 미국 사이에 엇박자가 나타나고 있다며, 이를 한미공조의 균열로 연계시키려는 보수진영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정 전 장관은 한미가 큰 틀에서는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이 국면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사이의 속도 비대칭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정 전 장관의 지적은 얼마 전 개최된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철도와 도로의 착공식을 11월 말에서 12월 초 열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해 보수언론 일부가 미국과 마찰이 생길 수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것을 반박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17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은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 핵프로그램과 별도로 진행될 수 없다'는 미국 국무부의 논평을 인용하며 한미공조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도한 바 있다.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속도가 일치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 비슷한 논지였다. 

이와 관련해 정 전 장관의 인터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미국 측이 보여주고 있는 상반된 행태가 바로 그렇다. 정 전 장관은 대북제재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미 행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물밑에서는 북미관계 정상화 이후를 상정한 민간 차원의 경제적 접촉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가 대외적으로 대북제재의 고삐를 죄는 듯 하고 있지만 광물 및 곡물 분야의 미국 기업의 방북을 암묵적으로 용인해 줌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미국 자본의 북한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면 아무래도 말이 쉽게 통하고 또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금방 북한 경제와 남한 경제가 한 덩어리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미국 기업이 먼저 선점해 버리면 우리가 들어갈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의 미국화라 할까나, 북한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아지면 솔직히 남북경제공동체 못 만들어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경제공동체 구상, 한반도 신경제지도 이거를 어렵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정 전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같은 행보를 '성동격서' 전략이라 내다봤다. 우리 정부에는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사이의 속도 비대칭을 거론하며 앞서가지 말라고 압박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북한 시장 선점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철도 및 도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 남북경협을 통해 경제적 유대관계를 미리 다져놓지 않는다면 미국 자본에 북한경제가 예속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가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날린 셈이다. 


ⓒ 오마이뉴스


정 전 장관의 일침은 한미공조 균열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보수진영의 태도와 맞물려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와 관련해 북미 간 비핵화 실무 협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남북관계의 속도 조절을 부각시키고 있는 미국의 진짜 속내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진영의 주장대로 정부가 정책적 대응을 할 경우, 다시 말해 남북관계 속도 조절에 나설 경우 실제적 이득을 얻게 되는 당사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글로벌 기업의 극비 방북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남북관계 속도가 늦어질수록 미국 기업의 북한시장 진입 가능성은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정 전 장관도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 지원 연설에서 "미국 정부는 투자 안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언급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북한 시장 진출을 위한 작업이 진행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공식적으로 대북제재를 거론하면서도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서는 자국 기업을 위한 여건 조성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수진영은 미국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황당한 건 그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발맞춰 남북관계 개선과 경협을 통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그들의 입장은 돌변했다. 불과 몇 년만에 그때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국보다도 먼저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남한보다 먼저 들어가서 손을 뻗쳐 놔야겠다라는 계산이 없으면 우리 기업들이 지금 북한에 투자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를 트럼프 대통령이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그걸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만 이해를 하고 공동보조론을 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공동보조론자들, 나중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격이 될 겁니다, 아마."

정 전 장관의 시각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날의 인터뷰는 여러모로 곱씹어 볼만 하다. 특히 "강시 같은 소리하지 말고 자전거페달을 어떻게 밟아야 자전거가 나가는지" 생각해 보라는 그의 일성은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의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보수진영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미국 측을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을 거는 미국의 의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이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 여기고 있다면, 특별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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