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이뉴스
자유한국당이 마침내 새로운 리더십을 확립했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의 굴욕적 참패 이후 가동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끝내고 신임 지도부를 출범시킨 것. 한국당은 지난달 2월 27일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신임 당 대표로 선출했다. 최고위원 5명의 얼굴(조경태·정미경·김순례·김광림·신보라)도 가려졌다. 이들은 앞으로 2년 동안 한국당을 이끌게 된다.
'비상' 꼬리표를 뗀 한국당이 다시 '정상' 궤도로 진입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온전히 신임 지도부의 역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정농단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끝없이 추락했던 보수진영을 재건·통합하고, 건전하고 합리적인 대안·정책 정당으로 거듭나게 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신임 당 대표가 된 황 대표의 어깨가 무거워진 이유다.
당원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 결과 황 대표는 총 6만8713표를 득표해 오세훈(4만2653표) 후보와 김진태(2만5924표) 후보를 압도했다.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권을 달려온 데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풍부한 국정경험이 보수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황 대표의 승리는 일찌감치 예견돼 온 터였다. 황 대표가 당내 최대 계파인 친박계의 구애를 받아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전대에서도 황 대표는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강력한 경쟁자였던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해 정우택·안상수·심재철 의원 역시 전대 일정 등을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다. 급기야 전대 막판에는 1위보다 2위 싸움이 더 치열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당 일부의 반발과 견제도 큰 변수는 되지 못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전대 출마 자격 논란은 당 선관위의 유권해석을 거치며 유야무야 됐다. 당권주자들의 무더기 불출마 사태를 부른 일정 논란 역시 당 지도부의 전대 강행 방침에 일단락됐다. 입당한지 한 달여 밖에 안 된 황 대표가 초고속으로 당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다.
많은 기대와 관심 속에 제1야당 대표가 됐지만 황 대표가 직면해 있는 현실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한국당은 국정농단 사건과 박근혜 탄핵을 거치는 동안 당세가 크게 위축된 상태다. 당은 둘로 나뉘어졌고, 민심 역시 등을 돌렸다. 그 결과는 대선 패배와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김병준 비대위가 들어섰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변화와 혁신은 지극히 더뎠고, 당 개혁의 바로미터라 여겨졌던 인적 쇄신과 계파 청산 역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 정부여당의 실책에 편승해 반사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 정책적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당은 경선 과정에서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5·18 망언이 불거져 나오는가 하면, 극우보수세력인 태극기 부대에 휘둘리는 장면이 여러 차례 연출되는 등 급속하게 우경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합리적 보수 재건을 바라는 당 안팎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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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황 대표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한대행 시절 박 전 대통령을 돕기 위해 특검 연장을 거부했다고 밝혀 구설에 오른 그는 이후에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절차에 동의할 수 없다거나, 태블릿 PC의 조작 가능성에 동조하는 등 잇따른 설화로 곤욕을 치뤄야 했다. 보수 개혁과 혁신에 앞장서야 할 당사자가 외려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황 대표의 언행은 좋게 해석하면 당권을 의식한 것일 테고, 나쁘게 해석하면 세계관, 즉 인식의 문제로 보인다. 황 대표의 앞날이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라면 황 대표의 정치적 운신의 폭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황 대표는 이번 경선에서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태극기 부대를 의식한 반헌법적·반민주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당내 기반과 절대적 지지층이 없는 그가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과감한 인적 쇄신과 계파 청산을 주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농후해 보이지만) 만약 후자라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다.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았다면 방조한 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래나 저래나 황 대표와 국정농단·박근혜 탄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홍 전 대표가 지난 1월 29일 당권 도전을 선언한 황 대표를 겨냥해 "이 당이 도로 탄핵당, 국정농단당, 친박당, 특권당, 병역비리당으로 회귀하게 방치하는 것은 당과 한국 보수 우파 세력에 죄를 짓는 일"이라 맹렬히 성토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황 대표에게 아른거리는 국정농단의 그림자를 염두한 비판일 테다인 것이다.
그런데 황 대표는 스스로 '탄핵 총리'를 연상시키는 문제적 언행을 이어가고 있다. 보편적 상식에 입각한 인식과 행보를 기대하는 다수 국민의 바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행보다. 황 대표를 향한 싸늘한 시선은 전대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이번 전대는 당원 선거인단 투표(70%)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30%) 결과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목할 것은 당원 득표에서 55.3%를 획득한 황 대표가 일반 여론조사에선 37.7%를 얻는데 그쳐 중도개혁 보수를 표방한 오 후보(50.2%)에게 크게 뒤졌다는 사실이다.
황 대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이 결과는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황 대표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돼 온 표의 확장성 문제가 현실로 확인된 셈이기 때문이다. 당심과 민심의 극명한 괴리는 한국당의 퇴행 및 우경화 논란과 맞물려 황 대표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숙제라는 평가다.
그런 면에서 황 대표의 첫번째 시험대는 '5·18 망언' 관련 인사에 대한 징계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윤리위에 의해 제명 결정이 내려진 이종명 의원과 징계가 유예된 김진태·김순례 의원의 징계 처리 여부에 따라 '황교안호'의 정체성과 노선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들에 대한 징계를 하지 않거나 어정쩡한 봉합에 나설 경우 황 대표는 시작부터 정치적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
황 대표 제체 출범 이후 여야 4당이 일제히 "국민 통합의 시작은 5·18 역사 왜곡으로 민주주의와 헌법을 부정한 김진태·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를 마무리 하는 것"(민주당), "5·18 망언 후보자들에 대한 징계, 3월 국회 개원과 선거제도 개편 협상, 민생 과제 등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바른미래당), "황교안 자유한국당 신임 대표는 가장 우선적으로 전당대회 출마를 이유로 보류한 5·18 망언 관련자 징계를 처리해야 한다"(민주평화당), "황 대표는 5·18을 모독한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의원직 박탈에 관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정의당)이라며 분명한 입장과 결단을 촉구한 것도 이같은 추론에 힘을 실어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당이 지금처럼 극우 퇴행적 행태를 고수한다면 합리적 보수와 중도층의 이탈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탄핵을 부정하고 태블릿 PC 조작 가능성에 동조하는 등 민심과 유리된 행보를 보이고 있는 황 대표의 결단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일 터다. 누구 말마따나 "도로 탄핵당", "국정농단당" 소리를 들어서는, 결단코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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