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으로 야합 처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멋대로 한다면 의원직 총사퇴를 불사하겠다"
여야 4당이 선거제·개혁법안 등을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할 움직임을 보이자 지난 3월 8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를 통해 공개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패스트트랙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날선 경고였다.
3월 12일 국회 정개특위 한국당 간사인 장제원 의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한국당은 논의 구조에서 빠진 채 패스트트랙에 태워진 선거법이 오는 12월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된다면 이 제도로 내년 4월 총선을 치를 수 없다. 차라리 의원직 총사퇴를 한 뒤 조기 총선을 할 것"이라고.
물론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쟁점 법안에 대해 국회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서명 또는 해당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신속처리 대상 안건으로 지정할 수 있다'라고 명시된 국회법 절차에 따라 패스트트랙을 상정했지만 아직까지 한국당쪽에서 의원직을 던진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의원직 총사퇴'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당은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상정에 항의해 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보이콧하며 '민생투쟁'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민생을 위해 등원을 거부하는 기상천외한 투쟁의 결과 국회는 벌써 두 달 가까이 '놀고' 있다. 국회의원은 있으되 일은 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1140만 원에 달하는 세비는 다달이 꼬박꼬박 챙기는 이른바 '민생방치 국회' 되시겠다.
말이 두 달이지 3월 임시국회에서 쥐꼬리만큼 일한 것을 제외하면 국회는 사실상 개점휴업이나 다름 없다. 1월과 2월을 통째로 날려 버리더니 4월과 5월도 같은 상황이다. 이는 6월 중순이 지나고 있는 현재까지도 마찬가지.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이런 국회는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국회 파행의 책임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당을 향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 국회 출범 이후 한국당이 국회를 보이콧한 횟수만 무려 19번이다. 약 두 달에 한 번 꼴로 국회를 마비시킨 셈이니, 이유야 어찌됐든 비판의 화살이 한국당으로 향하는 건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실제 여론도 한국당에 부정적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달 24∼25일 전국 성인 1천21명을 상대로 조사해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3.1%포인트) 26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국회 파행 사태와 관련해 '한국당에 책임이 있다'는 답변이 전체 응답의 51.6%로 집계됐다. 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책임이라는 답변은 27.1%였다.
국회 파행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회에 대한 비판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청원은 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문제 있는 국회의원을 국민이 소환해 투표로 재신임을 묻자는 취지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에 대해 세비를 반납하게 해야 한다는 요구도 들끓는다. 리얼미터가 YTN '노종면의 더뉴스' 의뢰로 지난 7일 조사해 10일 발표한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p) 결과, 국회의원 세비 반납 법안인 '일하는 국회법' 제정에 대한 찬성 응답이 무려 80.8%로 나타났다. (자세한 조사개요와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같은 여론은 일하지 않는 국회, 책임을 방기하는 국회, 무능한 국회를 향한 국민적 분노가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여야 모두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국회 정상화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 터다. 특히 명분 없는 장외투쟁으로 국회 파행을 주도하고 있다고 비판 받고 있는 한국당으로서는 뼈아프게 받아들여할 대목이다.
문제는 한국당이 현 상황을 달리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회 파행의 책임이 대통령과 집권 여당인 민주당에 있다며 연일 맹공을 펼치고 있다. 대통령과 민주당의 사과와 패스트트랙 철회 등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10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열렸던 1987년 6월 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이해찬 민주당, 손학규 바른미래당, 정동영 민주평화당,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참석해 6월 항쟁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겼다.
그 시각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 억압 실태 토론회'에 참석 중이었다. 황 대표는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하는 대신 심재철 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권은 역대 가장 비민주적인 정권"이라며 "언론 탄압과 국민 자유 침해에 투쟁하겠다"고 맹렬히 성토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군사독재시절이던 1970~80년대 불법 감금과 구타 등 국가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에 목숨을 잃은 장소이기도 하다.
황 대표는 '공안통'(公安通)이다. 독재·권위주의 시절 검·경은 고문은 물론이고 사건을 은폐·조작하는 등 권력의 하수인 노릇에 충실했다. 한국당은 인권과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해온, 군사독재정권의 '후신'(後身)이다. 그런 황 대표가, 한국당이 문재인 정부를 향해 "언론 탄압"과 "국민 자유 침해"를 부르짖는다.
정부 비판이라면 나 원내대표 역시 빠지지 않는다. 1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그는 "지금까지 국회 파행 과정과 이유를 되짚어 보면 불화와 정쟁 한가운데에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파당정치가 있다"며 "불법 날치기 패스트트랙 지정도 결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대한 청와대의 지나친 욕심이 화근이었으며, 문 대통령의 아집과 오기가 의회민주주의를 방해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시도 때도 없는 보이콧으로 국회 의사일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당이기 때문이다. 국회 파행의 원인이 문 대통령의 파당정치 때문이라는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19'라는 숫자 앞에서 현격히 설득력을 잃는다.
패스트트랙은 또 어떤가. 패스트트랙은 법안 처리가 지연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졌다. 한국당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특정 정당의 반대와 비협조로 법안처리가 무기한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더욱이 지난 2012년 이 법안을 주도한 당사자가 바로 지금의 한국당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패스트트랙이 불법이라 한다. 앞 뒤 말이 맞지 않을 뿐더러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절대다수 국민이 도입을 찬성하고 있는 공수처에 대한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한국당은 늘 이런 식이다. 언제나 '기승전-문재인 정부' 비판이다. 사안의 본질보다 정치적 유불리가 먼저다. 국익보다 자당의 이익이 우선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외교비밀 누설 파문이 그 비근한 예다.
외교 전문가를 비롯해 보수진영 내부에서도 남북정상 사이의 통화 내용을 폭로한 강효상 한국당 의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이마저도 정부 비판의 소재로 삼아 빈축을 샀다. 외교·안보를 중시하는 통상적인 보수의 모습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당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가 대체로 이렇다. 하루 아침에 약속을 파기하고(지방선거·개헌 동시투표), 손바닥 뒤짚듯 말을 바꾸고(최저임금인상, 평창동계올림픽), 사실과 다른 이야기(탈원전, 패스트트랙, 공수처)로 '혹세무민'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쳐댄다. 국가와 민족의 존립과 미래가 달린 한반도 평화와 외교·안보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에는 저주와 조롱 섞인 막말과 망언까지 잇따르고 있다.
고개가 절로 갸웃거린다. 한국당의 행태를 보면 마치 문재인 정부가 장기집권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막 2년이 지났을 뿐이다. 정책적 오류와 인사 혼선, 개혁적 성과의 미비를 비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권 전체의 성패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른 시기다.
더욱이 정부 정책은 결국 입법을 통해 완수된다. 지금처럼, 제1야당인 한국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작심하고 몽니를 부린다면 정부여당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당의 행태는 무책임의 극치다. 문재인 정부 이전 9년 동안 집권한 정당이 누구던가. 한국당 아니었나. 그 시절 경제와 민생은 어떠했나. 남북관계, 인권과 언론자유, 사회 정의는 또 어땠나.
정부여당을 맹폭하고 있지만 초유의 국정농단 사건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국격과 국민의 자존감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데 일조한 장본인들은 바로 작금의 한국당이 아닌가. 알았다면 직무를 유기한 셈이고, 몰랐다면 무능하다는 증거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적어도 기억은 해야 한다. 뭘 그리 잘했다고, 뭐가 그리 떳떳하다고 이리 기고만장한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이 정부가 싫다고, 이 정부 잘 되는 꼴은 못보겠다고 말하라. 억지 논리와 사실 왜곡, 갖은 말바꾸기로 국민을 호도하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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