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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언덕의 그때 그 순간

3·1절 비웃는 보수단체의 교과서 퍼포먼스

교과서살리기운동본부, 자유통일포럼 등의 보수단체가 3·1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바른역사 독립을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처음으로 현장 판매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로 인해 한바탕 홍역을 치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문제의 교과서를 다른 날도 아닌 3월 1일에 판매하겠다고 하니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의 머리 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희생을 차분히 기리며 묵도해야 하는 숭고한 날에 저 무모한 자들은 "95년 전 (3월 1일에) 대한독립을 만세 부른데 이어 이제는 자유통일과 바른역사를 위한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도단도 이만한  언어도단이 또 있을까? 수치스럽고 치욕스럽기 그지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동기가 수반된다. 보수단체들이 95주년 3·1절을 기념하여 바른 역사 독립을 외치며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판매하겠다고 나선 것은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올바른 교과서의 표본이라고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지도 않고 욕하지 말고, 읽고 나서 말하자'는 저들의 확고한 믿음처럼 과연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제대로 기술된 역사교과서라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교과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교학사의 역사교과서는 지난 해 10월 교육부로부터 251건에 달하는 수정·보안 권고를 받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현 교육부는 역사왜곡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실질적으로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교육부가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251건의 수정·보안을 권고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교과서의 오류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후 교육부의 수정·보완 권고와 교학사의 자체적인 수정으로 총 626건에 달하는 내용이 고쳐졌고, 12월 10일 교육부는 수정·보완이 완료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12월 24일 교육부는 출판사의 요청이라면서 또 다시 수정사항을 보완했다. 이렇게 해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총 937건 중 751건에 해당되는 내용을 수정했다. 검정단계부터 본다면 무려 2,122건에 해당된다. 이 정도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책 한권을 완전히 새로 기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건물로 치자면 부실공사도 이런 부실공사가 따로 없는 것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수정·보안된 건수 만큼이나 그 내용도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가득차 있다. 일본군 트럭에 끌려가는 위안부의 사진 아래에 '한국인 위안부는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가 어느새 자발적 참여자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피해 당사자가 이 내용을 보기라도 한다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리라. 일제의 헌병 경찰이 독립군 의병을 '토벌'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식스센스급 반전이다. '일제의 헌병 경찰이 아군이 되고, 독립군 의병과 독립운동가가 적군'이 되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독립군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대단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임시정부 승인 획득 운동의 주역이 이승만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던 주역들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김규식·조소앙·박찬인 등 충징의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이는 명백한, 의도적인 오류다. 이 교과서의 왜곡된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책 한 권을 다시 쓸 정도의 방대한 내용이 고쳐진 마당에 더는 말해 무엇할까?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불량품이 최종소비자에게 아무 문제없이 유통되도록 방치하고 있는 관련당국의 의중을 의심해 봐야 한다. 


미래세대에게 잘못된 역사관과 가치관을 심어줄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이 불량품이 아무 문제없이 유통될 수 있는 데에는 관련 당국의 방조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련 당국자들이 이 불량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교과서 왜곡 논란의 실체가 이내 드러난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황우여 대표는 "교과서를 하나 만들었는데 1%의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실을 아주 비통하게 보고 있다"고 애통해 한다. 불량품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이를 감시하고 규제해야 할  입장에 있는 집권여당의 대표란 자가 소비자가 불량품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되려 비통해 하고 있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대한민국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새누리당 실세 중의 실세 김무성 의원은 "7종 교과서가 현대사를 부정적인 사관으로 기술한 반면 교학사가 긍정적인 사관으로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다. 학생들이 역사 교과서 중 현대사 부분을 긍정적 사관으로 배워야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이에 따라 애국심을 갖고 국가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개드립을 서슴없이 날린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본제국주의를 미화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긍정적 사관이 되고 이것으로 배워야 애국심을 갖고 국가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이 영혼없는 정치인이 말하는 애국심과 국가란 과연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여기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명징한 근거가 있다. 지난 2008년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서 그녀는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과서의 출판으로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지 않은가.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뉴라이트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쯤되면 이 불량품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을 관련당국이 방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지원하고 나아가 소비자에게 적극 권장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누구 말마따나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거리낌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수단체들이 3·1일 오전에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바른역사 독립을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처음으로 현장 판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적어도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만큼은 철저하게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치 독도에서 대한민국 사람이 '독도는 다케시마다'라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과 같은 이 어이없는 망동이 아무 꺼리낌없이 일어날 수 있는 대한민국이야말로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 칭할 만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역시 시기의 문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이라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상식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더군다나 3월 1일에 이런 극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은 아무래도 나가도 너무 나갔다. 프로파간다는 좌파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은 이제 버려야 한다. 


글의 서두에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동기가 수반된다고 언급했다. 3·1절의 의미와 가치를 저들이 모를리 없다. 그렇게 본다면 역사왜곡의 상징인 교학사 교과서를 들고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저들의 얼굴은 일종의 조롱이다.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와 순국선열의 희생과 보편적 상식을 지닌 국민들에 대한 조롱이며 도발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렇게 읽힌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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