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좋고 수더분한 의사이자 벤처 기업인, 저명한 대학교수로 명망을 쌓아온 안철수 교수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당시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당당히 서울시장 후보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짚으며 5%대의 지지율을 보이던 박원순에게 시장 자리를 양보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이같은 모습은 기성 정치로부터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들은 낡은 정치를 개혁하고 혁신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안철수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대선출마를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정권교체와 정치개혁에 목말라 있던 국민의 염원을 해결해 줄 구세주이자 초인이었다. 지난 대선 내내 정국을 뒤흔들며 거센 폭풍을 일으켰던 '안철수 현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만 같았던 '안철수 현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대선 기간 동안 민주당의 구태와 계파문제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대한민국 정치 저렴화의 주역인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끊임없이 정치개혁과 혁신을 외쳤지만 구체적인 밑그림이 제시되지 않았고, '정치쇄신'과 '국민의 뜻'을 강조했지만 현실 속에서 실체를 보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모호한 말과 의뭉스러운 태도로 야권의 혼란과 혼선을 자초하기 일쑤였다.
안철수 의원의 이같는 모습은 대선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의 새정치를 내세우며 개혁가를 자처했지만 정치적 지향점은 여전히 뜬구름 위를 거닐고 있었고, 현실정치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늘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는 장면만을 연출시켰다. 그에게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정파적 이익이 빚어낸 참극일 뿐이었고,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은 진영간의 이념 논쟁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필자가 그에게 '정치공학도'라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실체없는 정치적 구호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대책없는 양비론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기성정치에 녹아있다. 필자는 안철수 후보의 정치 행보를 '신기루 정치', '불확실성의 정치'라 명명한 바 있는데, 그것은 실체없이 모호한 정치적 구호와 양비론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그의 행보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성정치를 혁신하겠다며 현실 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정치인의 저와 같은 흐릿한 태도는 비겁하고 무책임하며 위험하기 그지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새정치민주연합은 안철수 의원이 추진하려던 '안철수 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며 만들어진 정당이다. 필자는 당시 두 정치세력의 합당을 대단히 기이하고 오묘한 결합으로 진단한 바 있다. 두 정치세력이 한 데 뭉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었던 안철수 의원에게는 전국단위의 조직과 세력이 필요했고, 존재감없이 지리멸렬했던 김한길 체제의 민주당에게는 '안철수'라는 이름이 필요했을 뿐 이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었다. (안철수 의원의 정치적 스탠스는 보수 우파로 민주당보다는 새누리당에 더 가깝다.)
저 두 세력의 통합이 정치공학적 이벤트에 불과했다는 것은 그 동안의 불협화음들이 증명한다. 안철수 의원은 크고 작은 정치현안을 놓고 당내 주류들과 갈등과 마찰을 빚었고, 그때마다 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최근에 벌어진 안철수 의원의 혁신위 비판 역시 이들의 불안한 동거가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지난 2일 "혁신은 실패했다"며 당 혁신위원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어 6일에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혁신에 대해 논쟁하자는 것이지, 주류•비주류 계파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니다.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는 나를 보지 말고 국민을 봐야 한다"고 문재인 대표와 혁신위를 다시 한번 비판하고 나섰다.
안철수 의원의 혁신위 비판은 가장 안철수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안철수 의원이 혁신위를 비판하며 꺼내든 키워드는 '낡은 진보 청산', '당 부패 척결', '새로운 인재 영입'으로 모아진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친노'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철수 의원은 낡은 진보이자 부패 세력인 '친노'가 당 혁신위를 장악하고 있다고 믿고 있고, 바로 이로 인해 혁신위는 실패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가 혁신위를 비판하며 '친노패권주의'를 거론하는 모습은 지난 대선에서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는 당시 민주당의 계파문제와 구태정치를 비판하며 '친노'를 맹비난한 바 있다. 김한길 의원에게 '친노'가 '악'이라면 안철수 의원에게는 '적'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은 왜 이 시점에서 혁신위를 비판하고 나선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주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혁신위 비판에 대해 "7일 공천혁신안 발표 및 9일 당무위를 앞두고 혁신위 공격이 전면 전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현역(의원)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공천혁신안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그 각각의 불만을 모아 공천혁신안 당무위 통과를 저지시킴과 동시에 리더십을 의심받고 있는 문재인 대표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지도체제를 구축하고 현역·계파 기득권 보장 공천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안철수 의원을 향해서도 그가 인재영입위원장 제의를 거절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치인이건 학자건,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면서 "총론과 비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각론과 정책이 없으면 공허해진다"고 비판했다. 조국교수의 지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당을 되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온 안철수 의원의 혁신위 흔들기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의문은 총선과 대선을 앞둔 당권과 공천권에 대한 안철수 의원의 정치공학적 입장을 고려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안철수 의원의 혁신위 비판과 당내의 혁신위 흔들기가 결국 당권과 공천권 때문이며 나아가 그의 비판 역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모호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민주당과의 합당 이전 창당을 준비 중이던 '안철수 신당'은 기성정치를 뛰어넘는 '새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고 결국 이 이름이 민주당과의 통합 과정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현재의 당명에 이르렀다. 안철수 의원이 내세우는 정치 여정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바로 '새정치'라는 이름에 모두 투영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결국 안철수 의원이 바로 '새정치'이고, 새정치가 바로 '안철수'라는 고도의 계산이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 속에 녹아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의 염원을 안고 등장한 안철수 의원은 '새정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안철수가 표방하는 '새정치'의 다른 이름은 양비론에 근거한 '실체없음'에 불과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정치공학도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 정치인이 중도 개혁가로 교묘하게 포장되고 있는 현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정치가 '새정치'화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바람부는 언덕의 정치실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클릭)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무성 사위 집행유예의 몇 가지 의문점들 (8) | 2015.09.11 |
---|---|
빨갱이 오바마, 만약 한국에서였더라면 (12) | 2015.09.10 |
김무성 노조 발언은 노동개혁이 개악이라는 명백한 증거 (17) | 2015.09.04 |
어셈블리 진상필같은 정치인 어디 없습니까? (14) | 2015.09.02 |
커밍아웃 선언한 정종섭 장관의 무모한 용기 (10) | 2015.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