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성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우를 일컫는 말인 '커밍아웃'은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사상이나 정치적
지향점을 밝히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령 연예인이나 저명한 사회인사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도 광의의 의미에서 '커밍아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커밍아웃'은 사회적 편견이나 고정 관념, 일반화된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명징한 선언이나 다름없다. 세상을 향한 주체적 자아의 통렬한 자기선언이 바로
'커밍아웃'인 것이다.
어제 우리는
한 사회 저명인사가 4천만 유권자를 향해 외치는 강력한
'커밍아웃' 장면을 목격했다. 그의
'커밍아웃'이 왜 강력한가 하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시한 헌법과 이를
재차 강조한 공직선거법마저 초월했기 때문이다.
대개의 '커밍아웃'이 사회적 편견과 통념에
맞서고 있다면 그의 '커밍아웃'은 대범하게도 헌법과 공직선거법을 겨냥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강력하고 도발적인 '커밍아웃'인가. 화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다.
그가 '커밍아웃'을 외친 장소는 충남 천안의
새누리당 연찬회장이었다. 지난 25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정종섭 장관은 만찬의 건배사를 제안받은 자리에서 그동안 고이 숨겨왔던 속마음을 내비쳤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총선"을 선창하면 "필승"으로 답해달라며
여당 의원들과 함께 "총선 필승"을 외쳤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깨뜨리는 정치적인 '커밍아웃'을 선언한 것이다. 그의 '커밍아웃'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선거와 국민투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주무부처의 장관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정부조직법
제34조 제1항에는 행정자치부 장관의 역할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행정자치부 장관의
역할은 안전 및 재난에 관한 정책의 수립•총괄•조정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간의
분쟁조정과 선거, 국민투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고 막중하다.
그런데
정종섭 장관은 선거 주무부처의 장관으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듯이 너무나 당당하게 집권여당의 총선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정종섭
장관의 '커밍아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발언인지는 앞서 언급했던 헌법과
공직선거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내 드러난다.
대한민국헌법
제7조와 국가공무원법 제65조 및 지방공무원법 제57조에서 모두 강조하고 있듯이 대한민국의 법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다. 공무원 및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준엄한 법령인 것이다.
그런데
정종섭 장관은 공무원의 신분이면서, 더구나 선거 주무부처의
장관이면서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공직선거법이 금지하고 있는 정치 중립 의무를 거부하는 엄청난
'커밍아웃'을 선언하고 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새누리당의 총선 일정에 도움이 되도록 경제성장률이 3% 중반대로 복귀하도록 노력하겠다 발언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대놓고 '커밍아웃'을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야당의 반발에 대응하는 새누리당의 반응이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새누리당을 특정하지도 않았다면서, 덕담 수준의 건배사를
야당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오히려 반박하고 나섰다. 역시 새누리당답다. 주어가 없다"며 BBK가 이명박의 소유가 아니라는
희대의 궤변을 만들어낸 정당에서나 나올법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주장대로라면 앞으로 공무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연찬회나 행사 자리에 유권자만 없다면 언제든지 참석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도 문제가 안된다. 또한 특정 정당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은 채 정치적 발언이나 선거에 영향을
끼칠 행동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두가 현행 헌법과 공직선거법이 금지하고 있는 위법 행위라는 것은 새누리당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새누리당의
논리대로라면 그동안 자신들이 헌법과 공직선거법을 거론하며 시시콜콜 문제삼아왔던
(야당 지지) 공무원들의 정치 중립 의무 위반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말바꾸기를 극도로 경계해야만
한다. 저 당은 대통령부터 일개 의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발언을 뒤집는 일들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정종섭
장관은 논란이 거세지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한 덕담이었을 뿐이라며 지나친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선거 주무부처 장관이 집권 여당의 연찬회에 참석해 (여당의)
"총선 승리"를 외친 것을 아무 사심없는 덕담이라고 믿을 바보는
없다. 정종섭 장관이 헌법과 공직선거법이 명시하고 있는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과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의 정치 중립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정종섭 장관처럼 속마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면서 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정치적 발언을 할 요량이라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충족되어야만
한다. 현행 헌법과 공직선거법을 뜯어 고치거나 공무원 직을 던져 버리거나.
전자는
너무 복잡하고 난해한 과정이 잇따라야 하는 반면 후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정종섭 장관에게 제안한다. 이왕
'커밍아웃'을 선언한 이상 헌법과 공직선거법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어떨까. 정종섭 장관의 빠른 결단을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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