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나한테 넘어오면 내 돈 아닙니까? 그거 집에 갖다 주는 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내 활동비 중에서 남은 돈은 내 집 생활비로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준 돈을 전부 집사람이 현금으로 모은 모양입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던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2015년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저렇게 말했다. 2008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겸 국회운영위원장을 맡을 당시 매달 4~5천만 원 가량의 특수활동비가 나왔는데 쓰고 남은 돈을 집에 갔다줬다는 얘기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일화는 국민의 혈세인 특활비가 그동안 얼마나 엉터리로 집행돼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간으로부터 '눈먼 돈', '쌈짓돈'이라 비판받아 온 국회 특활비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특활비 내역 공개를 요구하며 법적 소송에 나섰던 참여연대가 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활비 전면 폐지를 주장한 데 이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역시 5일 국회 특활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언론이 특활비의 민낯을 파헤치는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면서 비판 여론이 솟구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참여연대는 이날 국회사무처로부터 특활비 지출결의서 1296건을 받아 분석한 결과를 전격 공개했다. 참여연대가 분석한 2011~2013년 국회 특활비 지출 내역에 따르면, 국회는 교섭단체 대표, 상임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특활비를 지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수활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교섭단체 대표에게는 매월 4000~6000여만 원, 상임위원장·예산결산특위원장·윤리특위원장 등은 600만 원의 특활비가 다달이 지급됐다. 이밖에 위원회별 여야 간사들과 위원들에게도 특활비는 고루 배분됐다.
박근용 참여연대 집행위원은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3년의 시간이 걸려 받아낸 국회 특활비 지출 내역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게 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열어 본 상자 속엔 너무나 엉망진창인 국회 모습이 들어 있어 안타깝다"며 "앞으로 우리는 국회뿐 아니라 특활비가 편성된 20개 중앙행정기관의 특활비 지출 내역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정보 공개를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참여연대가 공개한 자료는 국회사무처의 정보 공개 거부가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다. 앞서 지난 5월 3일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의정활동 지원과 위원회 운영지원, 의원외교 등의 명목으로 국회에서 집행돼온 특활비의 사용 내역을 공개하라며 참여연대가 낸 '국회 특수활동비 정보공개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하라'는 원심을 확정판결한 바 있다.
국회 현장에서 특활비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노 원내대표 역시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노 원내대표는 지난달 7일 특활비와 관련해 '양심고백'을 해 주목을 받았다. '정의와 평화의 의원 모임' 교섭단체 원내대표로 활동할 당시 받았던 특활비 세 달치를 "양심상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반납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연 노 원내대표는 "최근 대법원에서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는데 이는 국회의 특활비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라며 "동일한 이유에서 정의당은 특활비 폐지를 당론으로 주장해왔다. 오늘 특활비 세 달치를 전액 반납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날 노 원내대표가 반납 의사를 밝힌 액수는 '정의와 평화의 의원 모임'에 지급된 특활비 중 정의당 몫을 산출한 금액이다.
노 원내대표의 의지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예 특활비 폐지를 위한 법개정에 착수했다. 법안 발의에 필요한 최소 인원 10명을 채우지 못해 지난달 무위에 그친 국회법 개정안을 지난 5일 기어이 대표발의한 것이다. 앞서 4일 MBC <뉴스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특활비의) 절반은 은행 계좌로 왔고, 절반은 5만 원권 현찰로 밀실에서 1대1로 직접 주고 받았다"고 밝힌 노 원내대표는 흔적이 남지 않는 '깜깜이 돈'인 특활비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활비 논란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집행 내역 확인서를 첨부하도록 돼 있는 특활비는 실제로는 확인서가 생략된 채 사용되기 일쑤였다. 특활비를 개인적인 용도로 쓴 적이 있다고 밝힌 홍 전 대표와 신계륜 전 민주당 의원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영수증 처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보니 생활비, 경조사비 등 사적으로 유용되는 사례가 잇따르기도 했다. 참여연대 등이 국회사무처에 특활비 지출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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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활비는 국회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지난해 11월 24일 정우택 당시 새누리당(현 한국당) 원내대표는 국가정보원 및 검찰의 특활비 상납 의혹과 관련해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소속 의원 113명의 명의로 제출된 이 요구서에서 한국당은 "특활비의 부정한 유용은 소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병폐"라고 맹렬히 성토했다. 그러나 당시 국정조사까지 요구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던 한국당은 국회 특활비 문제에 대해서는 꿀 먹은 듯 조용하다.
제 밥그릇 지키기에는 다른 당 의원들 역시 큰 차이가 없다. 지난달 노 원내대표가 발의하려 했던 국회법 폐지법안이 무산된 것은 법안 발의를 위한 최소 인원이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국당 뿐만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소속 의원들 역시 특활비 폐지에 미온적이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입에 침이 마르도록 특권 폐지를 외쳐온 이들이, 국민 혈세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이들이 정작 국회 특활비 문제에는 손을 놓고 있었던 셈이다.
특활비가 법의 취지에 맞게 정당하고 투명하게 사용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논란이 되고 있는 특활비가 비단 국회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물론이고 국정원, 헌법재판소, 대법원, 검찰, 경찰 등 대부분의 국가기관이 특활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영수증은 물론이고 사용 내역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으니 갖가지 부작용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치권은 부랴부랴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자신들을 향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일 터다. 이 기회에 특활비를 둘러싼 의혹과 논란들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불합리한 제도와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바꾸지 않는다면 국민의 소중한 혈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누군가의 생활비로, 유흥비로, 그리고 주머니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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