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당장의 쓰라린 고통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실패의 경험을 잘 활용한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실패가 성공의 밑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반드시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실패는 성공이 아닌 또 다른 실패를 부를 뿐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제대로 성찰할 수 있어야 실패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실패 이후에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반성과 성찰 없이 과거의 행태를 똑같이 되풀이하려 한다면 말이다. 여기, 그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여기저기서 실패의 원인을 지적해 주어도 부득불 '마이웨이'를 고집하는 이가 있다. 시대착오적 인식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 오마이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19대 대선 후보와 당 대표를 지내며 한국당을 이끌었던 홍 전 대표가 11일 오후 미국으로 출국했다. 홍 대표는 미국에서 2개월 가량 머물면서 정국 구상에 몰두한 뒤 추석 무렵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홍 전 대표가 출국에 앞서 9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 화제다. 자신이 진두지휘했던 6·13 지방선거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설'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홍 전 대표는 인터뷰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가 지방선거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이 합작해 '평화 프레임'을 만들고 내가 대결하는 구도였는데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승부의 추가 더불어민주당으로 급속하게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당의 지방선거 전망을 비관적으로 진단하는 분위기가 정치권에 팽배했던 게 사실이다. 국정농단 사태와 박 전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보수층이 등을 돌리면서 한국당의 지지율은 민주당의 1/3 수준에 머물렀다. '국정농단 세력', '적폐세력'이라는 이미지에 갖히면서 한국당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당은 심한 계파 갈등으로 인해 인적 청산과 당 혁신에도 실패했다. 무조건적인 반대와 국정 발목잡기가 되풀이되면서 여론 역시 갈수록 나빠져갔다. "이름만 바꿨다",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는 쓴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이 와중에 홍 전 대표를 중심으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성회담 성사를 폄하하고 왜곡하는 발언까지 터져나왔다.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 여론에 찬물을 끼얹는 한국당의 행태는 보수언론마저 비판할 만큼 퇴행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홍 전 대표는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남북, 북·미 회담이 위장 평화 쇼'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나?"라는 질문에 "당연하다. 내가 지금 하는 말들이 여야 정치권이나 국민들 일반의 시각과 다를 것이라고 본다. 페이스북에 썼듯이 현재 상황은 지난 70년간 한국사의 본령을 이뤘던 한미일 중심의 자유주의 동맹을 문재인 정권이 뒤집어서 북중러 중심의 사회주의 동맹에 편입되려는 과정이라고 본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북한과 정상회담을 했지만 자유주의 동맹을 깨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아주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물론이고 외신들마저 남북, 북미 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 이후 참패의 원인을 두고 다양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당의 극단적인 이념 편향성과 노선을 꼽는 견해도 상당하다. 홍 전 대표는 비롯한 한국당 지도부의 무분별한 색깔론과 이념 공세가 일반 유권자는 물론이고 합리적 보수층의 외면을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은 주사파 정권"(홍 전 대표), "평창동계올림픽인가 북조선 인민 공화국에 100년 올림픽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김성태 원내대표), "문 대통령을 내란죄로 고발해야 한다"(심재철 의원) 등 당 지도부와 중진의원들이 앞장서 지속적으로 색깔 공세를 펼쳐왔다. 그러나 반공이데올로기가 급속히 퇴색된 지금 색깔론은 한국당의 퇴행성과 반지성을 드러내는 방증이나 다름이 없다. 결국 색깔론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국당의 수구·반공적 행태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된다.
김 원내대표가 1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최근 보수 일각에서 제기되는 보수이념의 해체에 대한 우려에 대해,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이미 평화와 정의, 그리고 공정과 평등을 지향하는 상황이다. 고정 불변의 도그마적 자기 이념에 갇혀 수구냉전적 사고를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보수의 자살이자 자해가 아닐런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길 바란다"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유권자 인식의 변화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과거의 관성에 얽매여서는 미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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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 전 대표는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지방선거 결과 당의 지지기반이었던 PK지역이 붕괴하고, 보수의 아성이자 텃밭인 TK지역마저 균열 조짐이 나타나는 등 유권자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음에도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홍 전 대표의 수구·냉전적 인식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곳곳에서 발견된다. 홍 전 대표의 발언 중 일부를 옮겨본다.
"곧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 미군 철수 움직임도 일어날 것이다. 한미 동맹은 가치 동맹이 아닌 이익 동맹으로 변질될 것이다. 국민이 이런 상황까지 동의한다면 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위장된 평화 프레임의 실체가 드러나면 국민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정부는 친북·좌파 이념에 너무 경도돼 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가 막말인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명한 대사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에서 마차를 기차로 바꿨을 뿐이다. 연탄가스, 바퀴벌레 등도 해당 상황에서 적절한 비유법을 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말'이라고 한다. 내가 이야기하면 당 안팎에서 모든 것을 '막말'이라고 매도했다. 황당한 프레임이었다. 지난 36년 공직 생활 동안 흠잡을 데가 없으니 기껏 덮어씌운 프레임이었는데 무던하게 참았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는 그의 인식이 시대흐름과 얼마나 유리돼 있는지, 국민 여론과 얼마나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참으로 무색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처철하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도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다면 정말이지 답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홍 전 대표가 6·13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자 누리꾼들 사이에서 그의 사퇴를 반대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양상이 온라인 상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연말 이후 정치 복귀 가능성을 내비치자 이를 격하게 환영하는 목소리가 분출되고 있다. 누리꾼들은 홍 전 대표가 하루 빨리 돌아와 한국당을 다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터다. 홍 전 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당이 직면해있는 위기의 심각성이 이 우스꽝스런 장면 속에 생생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홍 전 대표가 미국으로 사라진 날, 지난 11년 동안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한국당 여의도 당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 전 대표와 한국당이 시대정신과 국민 여론을 끝내 외면할 경우 마주하게 될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통렬한 반성과 뼈저린 성찰, 그리고 진정성있는 변화의 의지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이유일 터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 TK 자민련'이 문제가 아니라 존립 자체가 무너질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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