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한 자유한국당이 '돌연' 개헌 카드와 선거구제 개편을 들고 나와 주목된다. 김성태 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2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 회의에서 "개헌은 촛불의 명령이라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제 명령을 까먹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개헌 논의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의 주장에 세간의 반응은 의아스럽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선거 전까지만 해도 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6월 개헌 요구에 대단히 소극적으로 임해왔다. 한국당은 특히 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를 "사회주의 개헌", "관제 개헌"이라 비판하며 강하게 반대해온 터였다. 심지어 홍준표 전 대표는 "개헌안 표결에 들어가는 사람은 제명 처리 할 것"이라고 엄포까지 놨다. 그랬던 한국당이 갑자기 개헌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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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권한대행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그는 이날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개헌 논의가 이뤄지면 국가 권력 구조 개편과 함께 선거구제 개편, 권력구조 혁신 이 세 가지 문제는 필연적으로 맞물릴 수밖에 없다"며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에 함몰되고 매몰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개헌 논의와 함께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선거제도 개편'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취지다.
지난 한 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 가장 뜨겁게 논의됐던 의제 중의 하나가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문제였다. 당시 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던 유일한 정당이었다. 그런 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편의 핵심 아젠다로 손꼽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관련해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가. 한국당의 변심(?)이 놀랍지 않은가.
한국당의 느닷없는 개헌 요구와 선거제도 개편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방선거 참패가 한국당의 각성을 이끌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국민적 염원이자 시대적 당위였던 6월 개헌을 외면해왔던 한국당이, 정치권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돼온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미온적이었던 한국당이 뒤늦게 마음을 바꾼 배경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한국당이 갑작스럽게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 문제를 꺼내든 것은 존립 위기에 빠져있는 당내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당은 지방선거 이후 바람 잘 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선거 패배의 책임론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친박-비박' 간의 해묵은 계파싸움까지 불거지며 치열한 이전투구가 펼쳐지고 있다. 특히 지방선거 이후 당 수습을 주도하고 있는 김 권한대행은 사퇴압력에 시달리는 등 코너에 몰리고 있는 상태다.
김 권한대행이 꺼져가던 개헌 논의에 불씨를 살린 것은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카드라는 관측이다. 자신에게 쏠려있는 공세의 화살을 외부로 분산시키는 한편, 개헌 이슈를 통해 극심한 내분에 빠져있는 당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전선을 외부로 확대하는 것은 내부 갈등 극복을 위해 즐겨 사용되던 고전적인 전략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개헌 이슈는 정국의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휘발성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국면 전환에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한국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시사한 것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당은 승자독식의 현행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톡톡히 누려왔다. 한국당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와 단순다수제가 결합한 소선거구제를 통해 (중앙과 지방 가릴 것 없이) 의회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 결과 TK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국당이 완패하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그동안 소선거구제의 최대 수혜자였던 한국당이 오히려 피해자로 전락하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정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한국당은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25.45%의 득표를 받았지만 의석수는 전체 110석 중 5.45%인 6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부산시의회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36.73%의 지지를 받은 한국당의 의석점유율은 전체 47석 중 12.77%에 해당하는 6석에 불과했다.
인천시의회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한국당은 26.4%의 지지를 받았지만 의석은 단 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정당 득표율과 실제 의석수가 현격히 차이가 나는 이같은 양상은 TK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는 51%의 득표율로 광역의원 전체 의석 824석의 79%인 652석을 차지한 민주당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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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의 등가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이와 같은 선거 결과는 승자독식의 현행 소선거구제가 빚어낸 맹점으로 인식돼 왔다. 그동안 범시민사회가 선거제도 개편을 정치권에 끊임없이 요구해왔던 배경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있을 때마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강력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소선거구제의 이점을 마음껏 누려왔던 한국당이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선거 결과, 한국당은 유권자 표심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군소정당의 원내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킨다고 비판받아 왔던 현행 소선거구제의 직격탄을 맞았다. 전국 득표율 27.8%에 훨씬 못미치는 16.6%의 의석수(137석)를 얻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이에 정치권을 중심으로 그동안 한국당의 반대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선거제도 개편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 상황에서는 한국당의 다음 총선 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TK 지역정당으로 전락한 초라한 현실을 고려하면 한국당으로서도 더 이상 선거제도 개편에 미온적일 수는 없는 입장이다. 김 권한대행이 개헌 카드를 꺼내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수용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결국 당이 직면해 있는 이와 같은 복잡한 현실을 모두 고려한 행보로 풀이된다. 극심한 내홍에 빠져있는 당내의 상황을 개헌 이슈로 돌파하고,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다음 총선을 대비하려는 복안인 것이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홀아비 심정은 과부가 안다'더니 한국당이 딱 그런 모양새다. 아쉬울 것이 없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더니 막상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이것저것 다 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기존의 한국당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어쩌면, 한국당이 정치권의 오랜 숙제인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의 전도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6·13 지방선거가 만들어낸 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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