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이뉴스
'갑질 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진자'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지난 2015년 1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마켓링크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5%가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갑질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4~16일, 응답률 17%,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
설문조사 결과는 '대한민국은 갑질 공화국이다'라는 표현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증시켜준다. 갑질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오랜 기간 쌓여온 특권의식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당한 폭력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갑질은 특권의식에 사로잡인 우월감의 발로이자 봉건적 사고의 잔재다.
지난주 자신의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상습적인 폭언을 일삼아왔던 이장한 종근당 회장의 갑질이 커다란 화제가 됐다. 논란은 운전기사의 인격을 모독하는 이 회장의 욕설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며 파장이 커졌다. 사건이 알려지자 이 회장의 갑질을 성토하는 시민들의 비난이 봇물터지듯 쏟아졌다. 이 회장은 결국 기사가 난 지 하루 만인 14일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회장의 갑질은 경비원 폭행으로 물의를 빚은 MPK그룹 정우현 회장, 운전기사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과 김만식 몽고식품 명예회장, 라면이 설익었다며 기내 난동을 부린 포스코에너지 상무, 주차문제로 호텔 지배인과 실랑이를 벌이다 지갑으로 뺨을 때린 강태수 프라임베이커리 회장, '땅콩 회항' 사건으로 온 국민을 분노케 만든 조현아 대한항공 부회장 등과 별 차이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비슷한 것은 단지 저들의 갑질만이 아니다. 가진자의 갑질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반응 역시 대동소이하다.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분노는 어쩌면 을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응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덧없고 무력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마음껏 쏟아냈다 한들, 그래서 가진자의 고개를 잠시 숙이게 만든들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노가 휩쓸고 간 자리.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다. 갑의 횡포와 그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반복 재생되고 있을 뿐이다. 분노만으로 갑의 횡포가 사라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열번이고 백번이고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갑질의 질긴 생명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달리 이 나라가 갑질 공화국이라 불려지지 것이 아닐 터다. 우리는 갑질이 거세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이 빚어낸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가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다. 응답자들은 자신이 갑인지 을인지를 묻는 질문에 85%가 을이라고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을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을이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 41%가 자신 역시 '갑의 횡포를 부린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갑을의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자신을 을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사회적·계급적 위치에 따라 갑으로 변모한다는 이 조사결과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의 갑질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대한민국이 갑질 공화국으로 불리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분하는 기득권층의 '슈퍼 갑질'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갑의 횡포는 먹이사슬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갑질에 분노하던 이들 역시 사회적 약자를 향해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갑질이 사회공동체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사회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토해내고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보다 중요한 건 현실에 대한 명철한 진단과 해석, 그리고 그를 통해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나가는 일이다.
강준만은 교수는 <이른바 '갑질 공화국'의 '이카로스의 역설'>이라는 기고문에서 대한민국이 갑질 공화국이 된 이유를 압축성장의 부작용(황금만능주의 등), 효율을 기하려는 1극 중심주의가 낳은 서열주의, 낙수효과 중심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위계화,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은 기업사회 구축, 부정부패와 출세주의, 법치의 실종, 연고주의·정실주의·패거리주의 등 7가지로 꼽았다.
6.25의 참상을 겪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준만 교수는 학생들이 '갑질 교육'에 노출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같은 잘못된 관행이 우리사회의 갑질 문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카로스 역설(Icaros Paradox)을 예로 들며, 태양을 향해 날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채 관성과 타성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는 갑질의 가해자일 수 없다'는 예외 의식에 대한 성찰이다. 곧 갑질은 특정 권력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야 갑질을 일회용 분노로 소비하고 넘어가는, 그래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다."
강준만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갑질은 특정 부류의 계층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삶의 방식이자, 구조적인 문제라고. 누구든 갑질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그는 무엇보다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고 있다. 갑질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삐뚫어진 '갑을 문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갑과 을 사이의 불평등과 불공정을 개선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법과 제도를 정비해 왜곡된 갑을관계를 바로잡고, 치열한 경쟁과 서열화를 조장하는 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들이 병행될 때에라야 비로소 '갑질'이 만연한 부끄러운 시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갑의 횡포에 대한 일회적인 분노보다 현실에 대한 성찰이, 잘못된 환경을 바꾸려는 변화에의 의지가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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